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들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로버트 알트먼이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초기 대표작, '야전병원 매쉬 (MASH, 1970)'와 '내쉬빌'을 보면 확실히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로버트 알트먼 감독만의 독특한 영화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들은 언뜻 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의 영화인가 싶다. 기본 줄거리 없이 서로 다른 여러 작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등장과, 대사들을 무질서하게 겹쳐 놓는 방식으로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기조차 힘들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직선적인 줄거리를 가진, 주연과 조연의 역할이 뚜렷한, 그리고 한 캐릭터만 대사를 하게 하는 재래의 영화 형식을 거부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화에서처럼 끝이 있는 직선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들이 얽혀 있으며, 그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도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이 서로 충돌하고 맞닥뜨리면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독특한 영화 형식은 이러한 복잡한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들은 영화의 이야기에 앞서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독특한 영화 형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들이 단지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서로 다른 여러 이야기들이 점차 어떤 경향을 띠게 되면서 하나의 주제를 형성한다.
내쉬빌은 테네시의 주도로, 컨트리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이며, 한때 미국 음반의 대다수가 내쉬빌에서 만들어졌다. '내쉬빌'은 대통령 예비 선거를 엿새 앞둔 시점에서 5일 동안 내쉬빌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다룬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영화에서의 역할 비중이 비슷비슷한, 여러 부류의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쉬빌'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보면 삶이 참 허망하게 느껴진다. 저마다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화재 사고로 볼티모어에서 치료를 받고 내쉬빌로 돌아온 인기 컨트리 가수 바바라 진(Ronee Blakley)은 팬들에게 보여 주는 밝은 겉모습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녀의 매니저이자 남편인 바넷(Allen Garfield)은 자기중심적이고 다혈질인 사내이다. 대통령 예비 선거 전날에 파르테논에서 열리는 대안당의 대통령 후보자 할 필립 워커의 선거 운동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 존 트리플렛(Michael Murphy)은 바바라 진이 집회에서 노래를 불러 주기를 바라지만, 바넷은 정치권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평범한 가스펠 가수이자, 두 청각 장애인 아들의 엄마이기도 한 리네아 리즈(Lily Tomlin)는 청각 장애인 아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남편 델버트 리즈(Ned Beatty)와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리네아 리즈는 만나고 싶다고 끈질기게 전화질을 해대는 톰 프랭크(Keith Carradine)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그린 씨(Keenan Wynn)는 세상을 막 떠난 아내 에스더를 생각하며 비통해 한다. 숙모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그린 씨의 철없는 조카 L. A. 조안(Shelley Duvall)은 남자 가수들을 쫓아다니기 바쁘다. 아첨 잘하는 컨트리 가수 헤이븐 해밀턴(Henry Gibson)은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다. 헤이븐 해밀턴의 정부인 레이디 펄(Barbara Baxley)은 케네디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살고 있다. 외로운 병사 글렌 켈리 일등병(Scott Glenn)은 화재 사고에서 바바라 진을 구한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바바라 진을 따라다니며 그녀 곁을 지키고 있다.
'내쉬빌'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할 필립 워커의 선거 운동 집회가 열리는 파르테논에 모여든다. 이들이 각자 삶에서 느끼던 허망감이 이곳 파르테논에서 갑작스레 벌어진 총격 사건으로 극에 달한다. 순수해 보이던 청년 케니 프레이저(David Hayward)가 바바라 진을 향해 총을 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파르테논에 모인 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까지 허망감을 안겨 준다. 영화에서 케니 프레이저가 바바라 진을 향해 총을 쏜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허망하다.
'내쉬빌'은 미국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한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그리고 미국 국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 워터게이터 사건과 베트남전이 일어났을 때 만들어졌다. '내쉬빌'은 미국 독립 정신을 퇴색시킨 미국 정치를 비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음반 작업을 하려는 가수들과, 가수가 되고 싶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대통령 예비 선거를 앞두고 선거 운동이 한창인 내쉬빌에 몰려든다. 오팔(Geraldine Chaplin)은 내쉬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영국에서 온 BBC 기자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들을 보면 그녀가 진짜 BBC 기자인지 의심스럽다. 포크 록 트리오 "빌, 메리, 앤드 톰"의 빌(Allan Nicholls)과 메리(Cristina Raines), 톰 프랭크도 음반 작업을 위해 내쉬빌에 왔다. 빌과 메리는 부부이지만 메리는 톰 프랭크를 사랑하고 있다. 내쉬빌의 한 클럽의 무대 위에서 바람둥이 톰 프랭크는 잠자리를 같이한 오팔과 메리가 보는 앞에서 리네아 리즈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는 할 필립 워커의 선거 운동을 위한 모금 행사가 한창이다. 가수가 되고 싶은 공항 식당의 웨이트리스 수린 게이(Gwen Welles)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른 모금 행사의 무대 위에서 스트립쇼를 하게 된다. '내쉬빌'은 천박하고 위선적인 미국의 쇼 비즈니스와 정치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서 미국 국민들에게 허망감만 안겨 준 정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내쉬빌'은 남편 스타(Bert Remse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수가 되고 싶어 가출까지 한 앨버커키(Barbara Harris)가 총격 사건으로 아수라장이 된 무대 위에 올라, 삶에, 총격 사건에, 그리고 정치에 허망감을 느끼고 상처받은 파라테논에 모인 모든 이들을 위로하듯 'It Don't Worry Me'를 부르면서 끝을 맺는다.
'내쉬빌'은 뮤지컬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노래들이 나온다. 노래의 대부분은 영화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 배우가 작곡을 했는데, 그중에서 톰 프랭크를 연기한 키이스 캐러딘이 작곡을 하고, 영화에서는 톰 프랭크가 리네아 리즈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부르기도 하는 'I'm Easy'는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쉬빌'에 엘리엇 굴드(Elliott Gould)와 줄리 크리스티(Julie Christie)가 자기 자신을 연기하며 잠깐 출연한다. 바바라 진과 리네아 리즈를 각각 연기한 로니 블레이클리와 릴리 톰린은 동시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둘 다 수상은 하지 못했다. '내쉬빌'은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주제가상의 4개 부문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아카데미 주제가상만 수상했다. '내쉬빌'은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2007년에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 10주년 기념판 (AFI's 100 Years...100 Movies 10th Anniversary Edition)"에서 59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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