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Laura, 1944)

영화 2021. 1. 26. 08:37

성공한 광고 회사 디자이너 로라 헌트(Gene Tierney)가 자기 아파트에서 얼굴에 산탄총을 맞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진 채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 수사를 맡게 된 민완 형사 마크 맥퍼슨(Dana Andrews)은 로라의 보호자격인 저명한 칼럼니스트 왈도 라이데커(Clifton Webb)와, 로라의 약혼자 셸비 카펜터(Vincent Price), 그리고 로라의 이모 앤 트레드웰(Judith Anderson)과, 로라의 하녀 베시 클래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이들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벌인다.

베라 카스파리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로라'는 필름 누아르(film noir)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영화이다. '로라'는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10개의 영화 장르에서 각각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 (AFI's 10 Top 10)"의 미스터리 영화 장르 부문에서 '현기증 (Vertigo, 1958)', '차이나타운 (Chinatown, 1974)', '이창 (Rear Window, 1954)'에 이어 4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6위에 랭크되어 있는, 역시 필름 누아르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 1941)'보다도 순위가 높다.

주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제작된 필름 누아르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미국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어두운 흑백 화면을 통한 음울한 영화의 분위기와,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영화의 이야기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필름 누아르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곳이고, 타락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상이 영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로라'의 이야기는 뉴욕 상류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 벌어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형사인 마크를 제외하고는 '로라'의 등장인물들 모두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이다. 하지만 마크도 결코 정상적이지는 않은데, 마크는 사건을 수사하다가 죽은 로라에 대한 욕망에 빠져든다. 마크가 로라의 아파트에서 혼자서 벽에 걸린 로라의 초상화를 쳐다보며 술을 마시는 장면은 기괴망측하다.

왈도는 마크에게 자신과 로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왈도와 로라의 만남에서부터 살인 사건 직전까지의 과정을 보여 준다. 로라를 뉴욕 광고계의 실력자로 키운 왈도는 로라에 집착하고, 로라의 주변 남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로라가 로라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자코비와 사랑에 빠지자, 왈도는 자코비에 대한 악의적인 칼럼을 써서 로라와 자코비 사이를 갈라놓는다. 로라가 앤의 파티에서 만난 셸비와 사랑에 빠지자, 왈도는 로라에게 셸비의 결점을 늘어놓고, 셸비가 로라의 광고 회사 모델인 다이앤 레드펀과 어울려 다닌다고 폭로한다.

켄터키 출신의 한량인 셸비는 앤의 파티에서 만난 로라의 도움으로 로라의 광고 회사에 취직한다. 셸비와 로라는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한다. 하지만 셸비는 로라와의 결혼을 앞두고 다이앤과 염문을 뿌리고, 앤과도 수상한 관계에 있다. 직업이 없던 셸비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한 앤은 조카딸인 로라와 결혼을 앞둔 셸비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 왈도를 통해 셸비와 다이앤의 관계를 알게 되고, 또 셸비와 앤이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로라는 셸비와의 결혼을 재고하기 위해 자신의 시골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필름 누아르는 복잡한 플롯과 계속되는 반전으로 유명하다. '로라'의 이야기에도 반전이 있는데, 마크가 로라의 아파트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을 때, 살아 있는 로라가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사실 얼굴에 산탄총을 맞고 죽은 사람은 로라가 아니라, 로라의 가운을 입고, 로라의 슬리퍼를 신고 있었던 다이앤이었다. 로라가 시골 별장으로 여행을 간 사이, 셸비가 다이앤을 로라의 아파트로 데리고 왔고, 다이앤이 얼굴에 산탄총을 맞고 살해된 것이다. 자신의 시골 별장에서 돌아온 로라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죽은 로라와 사랑에 빠졌던 마크는 살아 돌아온 로라에게 집착한다. 마크는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로라를 수사하면서 로라가 여전히 셸비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하려 한다. 마크는 돌아온 로라에게 셸비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아니면 하지 않기로 결심했는지를 묻는다. 마크는 로라를 다이앤의 살인범으로 지목하여 경찰서의 취조실로 데리고 가 로라를 취조하는데, 로라가 살인범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로라가 여전히 셸비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필름 누아르는 냉혹하고 비열한 거리, 냉혹하고 비열한 거리만큼이나 냉혹하고 비열한 영화의 주인공, 어두컴컴한 그림자, 치명적인 매력으로 자신은 물론 주변인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팜므 파탈을 특징으로 한다. '로라'에서의 팜므 파탈 로라는 '말타의 매'에서의 팜므 파탈 브리지드 오쇼네시(Mary Astor)나, 빌리 와일더 감독의 필름 누아르인 '이중 배상 (Double Indemnity, 1944)'에서의 팜므 파탈 필리스(Barbara Stanwyck)에 비하면 아주 순한 편이지만, 로라 역시 자신의 주변 남자들을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만든다.

왈도는 성적인 매력에 대하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왈도는 자코비에 대해 "그는 화가보다는 운동선수로 보이려고 신경쓰고 있음이 확실했죠."라고 말한다. 왈도는 마크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로라에게 "로라, 당신에게는 안타까운 약점이 하나 있어. 당신에게 남자의 기준은 군살이 없는 건장한 체구지. 그리고 항상 당신이 상처를 받지."라고 말한다. '로라'의 초반부에 왈도는 욕조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신을 탐문 수사하러 온 마크를 맞이한다. 왈도가 욕조에서 나오면서 마크에게 가운을 건네 달라고 부탁하자, 마크가 벌거벗은 왈도를 보고 비웃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왈도의 콤플렉스를 암시해 주는 장면이다.

'로라'의 제작 과정과 관련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로라'의 제작사인 20세기폭스사의 사장 대릴 F. 자눅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토 프레밍거 감독 대신에 루벤 마물리언 감독에게 '로라'의 연출을 맡겼다. 하지만 루벤 마물리언 감독이 작업한 러시(편집되기 전의 영화 프린트)가 재앙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한 대릴 F. 자눅은 하는 수 없이 오토 프레밍거 감독에게 '로라'의 연출을 맡긴다. 오토 프레밍거 감독은 '로라'의 촬영 감독을 조셉 라쉘 - 조셉 라쉘은 '로라'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하였다 - 로 교체하고,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로라의 초상화도 교체하고, 시나리오도 수정하고, 많은 장면들을 재촬영하여 영화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오토 프레밍거 감독이 연출한 '로라'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릴 F. 자눅은 다른 결말을 고집하였다. 하지만 칼럼니스트인 월터 윈첼이 대릴 F. 자눅이 고집한 '로라'의 결말을 보고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대릴 F. 자눅은 하는 수 없이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원래의 결말로 되돌려 놓는 것을 허락하였다. 만약에 월터 윈첼이 없었다면 관객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결말로 끝나는 '로라'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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