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봉인'은 남성 코러스가 화려하게 노래하는 '디에스 이라이(Dies Irae)'가 들리면서, 어두운 하늘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요한 묵시록'의 독수리가 조용히 비상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제7의 봉인'의 영화 제목을 따온 '요한 묵시록' 8장 첫 부분의 발췌문이 내레이션으로 서술된다. "어린양이 제7의 봉인을 떼었을 때, 하늘에는 반 시간 가량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일곱 개의 나팔을 든 일곱 천사가 나팔 불 준비를 했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제7의 봉인'은 대단히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이다. 14세기 중엽,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Max Von Sydow)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10년만에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왔으나, 온 나라를 휩쓴 페스트와 마녀 사냥의 집단적 광기로 고국은 황폐해져 있다. 기사는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Bengt Ekerot)에게 체스 게임을 제안하고, 자신의 죽음을 유예해 줄 것을 요구한다. 기사는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현실의 징후들과,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번민과 고뇌에 휩싸이지만, 자신과 세상을 구원해 줄 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짧은 여정을 시작한다. 기사와 그의 종자 옌스(Gunnar Bjornstrand)의 여정은 새벽녘 해변에서의 일출과 더불어 시작되어 하루 뒤, 번개치던 밤의 어둠이 아직 남아 있는 언덕 비탈 위에서 죽음의 춤을 이끄는 사자의 모습으로 끝나는데, '제7의 봉인'은 기사가 옌스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통해, 신의 존재와 인간의 구원, 그리고 삶의 부조리함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던지는 영화이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제7의 봉인'을 개봉하면서 그가 프랑스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여러 차례 재출간된 잡지 '예술'에서 '제7의 봉인'의 기원의 본질을 말해 준 바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때때로 스톡홀름 근교의 작은 시골 교회로 출장 설교를 가셔야 했던 아버지를 따라가곤 했다. ...아버지가 설교를 하고, 신도들이 기도하고 노래부르고 강론을 듣는 동안 나는 낮은 궁륭들과 두꺼운 벽, 영원의 내음, 그리고 천장과 벽의 중세 그림들과 조각상들이 살고 있는, 이상한 서식지 위에서 흔들리던 색색의 햇빛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은밀한 세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예술' 667호, 1958)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어린 시절 교회의 벽화와 조각상에서 보았던, '요한 묵시록'의 독수리, 기사와 체스를 두는 죽음의 사자, 장미 정원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성모 마리아, 인간이 기어올라간 생명수를 베는 죽음의 사자,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 위로 마지막 춤의 행렬을 암흑의 나라로 이끄는 죽음의 사자 등은 그를 즉각적으로 매혹시켰고, 그는 유년의 기억에서 따온 이미지를 영상화하여 '제7의 봉인'에 고스란히 담았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예술'(667호, 1958)에서 "유년기의 내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 내게는 확실하고 유익해 보였는데, 이는 내가 현재의 딜레마를 표현하는 일에 어색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목적은 중세의 화가와 동일한 객관적 참여, 동일한 감성과 동일한 환희를 일으키면서 그려내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제7의 봉인'에 실제로 스웨덴 중부 및 남부의 여러 교회에 체스를 두는 죽음의 사자와 같은 벽화들을 남긴 스웨덴의 중세 화가 알베르투스 픽토르(Albertus Pictor, Gunnar Olsson)가 등장한다. 알베르투스 픽토르는 교회를 찾은 옌스에게 자신이 교회의 벽에 그린 죽음의 춤과, 페스트로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고행자 행렬에 대해 설명해 주는데, 앞으로 '제7의 봉인'에서 나올 장면들을 예고하고 있다.

기사는 교회의 고해소에서 고해 신부에게 - 그리고 관객들에게 - 신과 인간 실존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소. 그러나 내 마음은 비었소. 이 공허함은 내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오. 난 혐오와 공포에 사로잡혀 있소. 인간에 대한 경멸 때문에 나는 그들 집단으로부터 거부당했소. ...자신의 감각으로 신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오? 왜 그는 불분명한 약속과 눈에 보이지 않는 기적들 뒤에 숨어 있소? 믿지 못하면 신도들을 믿으라고!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우리에게, 믿고 싶지도, 믿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오? 왜 나는 내 안의 신을 죽일 수 없소? 왜 그는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계속 살아 있는 것이오? 나는 내 마음에서 그를 쫓아내고 싶소. 그러나 그는 나를 뒤쫓는 조롱하는 현실로 남아 있소. 이해하겠소? 알고 싶소. 믿고 싶은 게 아니오. 추측이 아니라 알고 싶은 거라오. 난 신이 손을 내밀기를 원하지만 그는 침묵만 지키고 있소. 암흑 속에서 난 그를 향해 소리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소. ...그렇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라오! 사람들은 죽음과 허무를 마주한 채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소. ...그러다가 그들은 고비에 이르고 암흑을 봅니다. ...알고 있소. 우리의 두려움에 신이라고 부르는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우연히 마주친 광대 부부, 요프(Nils Poppe)와 미아(Bibi Andersson)에게 신선한 우유와 산딸기를 대접받는다. 요프는 기사에게 아름다운 치터 연주도 들려준다. 기사는 잠깐이나마 신의 침묵과 죽음의 허무로 인한 번민과 고뇌에서 벗어나, 자기 아내와 함께 보낸 행복한 과거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기억을 떠올린다. 기사가 고해소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이 광대 부부와 함께 하는 동안에 일어난다. 기사는 미아와의 만남을 통해 마치 기적처럼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신의 거리감과 냉담함마저 극복하게 된다. 기사는 미아에게 그녀의 아이 미카엘에 관해 묻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천성적인 생기를 칭찬하면서 미아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기사는 요프와 그의 가족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카엘에 관한 대화를 계속 나누는 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심을 입증하고 광대 가족을 자기 보호하에 두고 싶은 의지로 구체화된다. 되살아난 향수와 이로 인해 자기 과거를 추억하면서 미래에 대한 사유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사자와의 계속되는 게임을 합법화한다. 나중에 기사는 체스판을 뒤엎는 교란 작전을 펴 그 사이 사자의 주의를 돌리고, 광대 가족이 사자에게서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광대 가족에게 자비를 베푼다.

기사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광대 부부와 함께 하는 온화하고 평화로운 순간의 장면은 바로 직전의 어둡고 난폭한 술집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부모의 품안에서 소중하게 보호되고 위안을 받는 아이와 남편을 향한 미아의 헌신을 본 기사는 관대함을 겸비하고, 생명의 기쁨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기사는 사랑과 생명력이 충만한 광대 가족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다.

기사가 광대 부부와 함께 하는 동안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사자와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고해소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며, 인간은 항상 죽음과 대면하고 있다.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에 계속해서 기댈 수 밖에 없다. 기사는 화형대에서 처형될 마녀(Maud Hansson)를 통해 다시 한번 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탐색을 계속한다. 이때 무신론자인 옌스는 기사의 종교적 질문들이 결정적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기사에게 호소한다. "그녀가 뭘 보고 있소? 내게 말해 줄 수 있소? 누가 그녀를 돌보게 됩니까? 천사들? 신? 사탄? 허무? 허무겠죠, 나으리."

'제7의 봉인'에서 경건하게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는 기사와 정반대로 대조되는 인물인 옌스는 무신론자이자 냉소주의자이다. 옌스는 종교와 신앙에 회의적인 인간들을, 또는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적이고 고집스런 인간의 또 다른 내면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제7의 봉인'은 엄숙하고 경건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유머와 희극적 요소가 있는 장면들로 관객들에게 해학과 웃음을 선사한다. 주로 삶의 부조리함과 인간성의 타락을 풍자하는 장면들인데, 이 장면들을 보면 지극히 연극적이다. 곡예 단장 스카트(Erik Strandmark)와 광대 부부는 마을 광장에서 사랑의 유혹이라는 테마로 호색한과 바람난 여인이 등장하는 공연을 한다. 스카트는 공연 도중에 무대 뒤에서 대장장이 플로그(Ake Fridell)의 아내 리사(Inga Gill)와 바람을 피우는데, 연극 공연과 실제 사건이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교차된다. 또한, 숲에서 마주친 플로그와 스카트가 리사를 두고 서로 대립하는 장면에서, 옌스는 자신이 마치 연극 연출가라도 된 듯, 스카트와 말싸움을 하는 플로그에게 대사를 일러 주고, 플로그와 스카트가 대립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리고 스카트는 마치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 연극용 칼로 자살을 연기한다.

60여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TV 영화 등을 연출한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원래 연극계 출신으로, 170여 편의 연극을 연출하기도 한 연극 연출가이기도 하다. '제7의 봉인'도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자신의 연극 '숲이 있는 풍경'을 각색한 영화이다. "내가 '제7의 봉인'을 썼을 때, 내 안에는 좌절한 극작가가 있었다. 이 시기에 나는 영화를 위한 연극들을 구상했다. 왜냐하면 내게는 연극이 훨씬 친숙해 보였기 때문이다."('제7의 봉인에 초점을 맞추어 (Focus on the Seventh Seal)')

연극의 문제는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예술적 관심사로, '제7의 봉인'의 중심부에 있다. 삶이 배우의 허풍과 연극적 기교를 고발한다면, 역으로 연극은 자신과, 타인들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진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이, '제7의 봉인'은 예술가가 사회에서 자기 위치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 말고도 재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극과 영화에 활동을 집중하면서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삶과 연극 사이의 이러한 혼돈을 수차례 떠올렸다.

'제7의 봉인'에서 사랑이 충만한 광대 부부와 대조를 이루는 대장장이 부부와, 타락한 사제 라발(Bertil Anderberg)은 인간의 나약함과 변덕스러움, 인간성의 타락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제7의 봉인'에서 젊은 처녀(Gunnel Lindblom)는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젊은 처녀는 영화 내내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페스트에 걸려 죽어 가는 라발에게 물을 갖다 주려 하는데, 고통받는 자에 대한 그녀의 동정은 총체적이고 사심이 없다. 아무말 않는 젊은 처녀가 피안의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기사보다 오히려 조금 더 멀리 보는 것 같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기사의 아내 카린(Inga Landgre)이 '요한 묵시록'을 읽는 중에 사자가 문을 두드리면서 찾아오자, 젊은 처녀는 마치 사자를 기다린 듯이 사자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말한다. 젊은 처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사는 죽는 순간의 그리스도가 한 마지막 말을 상기시킨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어요."

기사와 옌스, 대장장이 부부와 젊은 처녀는 천둥 속에서 가까스로 기사의 성에 도착한다. 페스트에도 불구하고 성에 남아 남편을 기다린 카린은 식사를 하는 이들에게 '요한 묵시록'을 읽어 준다. 카린이 읽은 '요한 묵시록' 구절은 처음 세 천사의 나팔로 야기된 천상의 표지와 재앙을 묘사하면서 침묵이 끝났음을, 사자가 기사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불안한 상태는 신의 어떤 "계시"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신은 인간들에게 말하지 않고, 오로지 사자만이 조용히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러 오는 이들을 찾으러 온다.

자신의 죽음을 유예하면서까지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결국 신의 침묵에 절망한 기사는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마지막 기도를 한다. 이는 어떠한 것도, 신의 침묵조차도 잠재우지 못하는, 보다 우월한 결정 기관 옆으로 몸을 피하고 싶은 인간 내면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기사의 도움으로 사자에게서 벗어난 광대 가족이 빛이 쏟아지는 새벽에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요프는 미아에게 아직 어둡고 번개치는 지평선을 가리킨다. 지평선 위로 사자가 죽음의 춤을 추는 그들의 옛 친구들을 데리고 가고 있다. 요프의 마지막 환영은 죽음의 춤이 지나감을 환기시키고, 요프의 마지막 대사는 어린양에 의한 제7의 봉인의 개시 바로 직전에 이루어지는 '요한 묵시록' 본문을 제마음대로 설명한다. "그들이 멀어지고 있어. 그러는 동안 자비의 비는 그들 얼굴에 묻은 눈물의 쓰라린 소금기를 씻어주고 있어." - "왕좌에 있는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이다."('요한 묵시록' 7,17)

그러자 미아가 요프에게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당신이나 당신의 환영이나!"

'제7의 봉인'은 요프를 향한 미아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신학적 사고의 추구를 과감히 벗어난다. 이 신학적 사고가 미아가 구체화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망각시키기 때문이다.

'제7의 봉인'이 시작하면서 남성 코러스가 화려하게 노래하는, 그리고 고행자 행렬이 노래하는 '디에스 이라이'는 1250년경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첼라노의 토마스가 작곡한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곡'에 속하는데, 노래 자체는 "야훼가 오시는 날"을 알리는 예언서 '스바니야서'에서 영감을 얻는다. "분노의 날, 그날/번민과 고난의 날/한탄과 황폐의 날/암흑과 먹구름의 날...."('구약성서', '스바니야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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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nforget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