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은 홍콩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왕가위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홍콩 영화이다. '중경삼림'은 사실 작은 소품으로 기획된 영화이다. '동사서독 (東邪西毒, 1994)'의 촬영이 지체되고 작업이 잠시 중단되면서 조금 한가해진 왕가위 감독은 간명하고도 빠른, 특히 현대 영화 한 편을 찍고 싶었다. 자신의 영화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의 경우, 시나리오도 완성하지 못한 채 촬영에 들어갔으며, 시나리오를 쓰면서 순차적으로 찍어 나갔다. 이렇게 제작된 '중경삼림'은 예상외로 큰 히트를 기록하며, '95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남우주연상, 편집상, 최우수 감독상의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중경삼림'은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 간행하는 영화 전문 월간 잡지 'Sight & Sound'가 2022년에 발표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The Greatest Films of All Time)"에서 88위에 랭크되어 있다.

'중경삼림'과, 영어 제목인 'Chung King Express'에서 "중경" 및 "Chung King"은 영화의 배경인, 홍콩 주룽반도(九龍半島)에 있는 중경 맨션(重慶大厦)을 말하는데, 값싼 숙박 시설, 가게, 인도 음식점이 모여 있는 퇴락한 건물인 중경 맨션은 아주 여러 가지의 문화가 섞여 있고, 각종 국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는 곳이다. 왕가위 감독은 도시 중경이 자신에게는 바로 미시적인 세계였고, 도시의 메타포로서 아주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스쳐지나가는 젊은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중경삼림'은 중경의 스쳐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Chung King Express'에서 "Express"는 영화의 또 다른 배경인, 홍콩섬의 란콰이퐁(蘭桂坊)에 있었던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를 말하는데, 'Chung King Express'는 중경 맨션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합친 것이다.

'중경삼림'은 두 개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두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실연한 경찰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은 이름이 하지무인 경찰 223(금성무)으로, 1994년 4월 28일 금요일 밤 9시에 금발머리에 선글라스, 그리고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한 여자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경찰 223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친 이 순간. 서로의 거리는 단 0.01cm였고,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경찰 223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애인인 메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녀는 이곳에 오는 것을 좋아했는데,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매니저(진금천)가 그녀를 야마구치 모모에를 닮았다고 칭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마구치 모모에의 남편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우절에 그녀에게 버림받은 경찰 223은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그녀와 헤어진 4월 1일부터 매일 하나씩 유통 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파인애플은 그녀가 좋아하던 것이고, 5월 1일은 경찰 223의 생일이다. 경찰 223은 파인애플 통조림이 30개가 될 때까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를 잊기로 했다. 4월 30일 일요일, 한 편의점에서 30번째 파인애플 통조림을 겨우 구한 경찰 223은 파인애플 통조림이 30개가 되어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30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혼자 다 먹어 치운다. 그날 밤 술집에 간 경찰 223은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금발머리에 선글라스, 그리고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가 들어온다.

언제 비가 올 지 또 언제 햇빛이 눈을 따갑게 할 지 몰라 항상 선글라스에 레인코트를 입고 다니는 금발머리의 여자는 마약 밀매상(임청하)이다. 마약 밀수를 위해 고용한 인도인 일당과 함께 공항에 도착한 그녀가 공항 수속을 하는 사이에 인도인 일당이 마약과 함께 사라진다. 백인 두목이 배신한 것이다. 그녀는 인도인 일당을 추적하여 사살하고, 인도인 일당의 추격을 가까스로 따돌린다. 그날 밤 그녀는 지쳐 찾아간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둘은 그날 밤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경찰 223은 쉬고 싶다는 그녀를 호텔로 데리고 가 지친 그녀의 밤을 지켜 준다. 날이 밝아 오자 경찰 223은 그녀의 피곤을 반영해 주는 더러워진 구두를 벗겨 깨끗이 닦아 놓은 후 호텔방을 떠난다. 아침 6시에 태어난 경찰 223은 25살이 되는 5월 1일 아침 6시를 앞두고 비가 오는 데도 운동장에서 조깅을 한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르고,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아침 6시에 경찰 223은 삐삐를 통해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는다. 경찰 223이 금발머리에 선글라스, 그리고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한 여자를 스쳐지나간 지 정확히 57시간 후다. 짧은 하룻밤의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경찰 223에게 만년이 지나도 잊고 싶지 않은 사랑을 심어 주었다.

 

경찰 223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또 한 여자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경찰 223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친 이 순간. 서로의 거리는 단 0.01cm였고, 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경찰 223이 스쳐지나간 여자는 두 번째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인 페이(왕정문)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매니저가 사촌오빠인 페이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사촌오빠를 도와주기 위해 지금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캘리포니아에 가는 꿈을 꾸고 있다. 페이는 스튜어디스인 애인이 오는 날이면 그녀가 좋아하는 샐러드를 사기 위해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들르는 경찰 663(양조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중 경찰 663의 애인인 스튜어디스(주가령)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나타나 경찰 663에게 전해 달라며 사촌오빠에게 편지를 맡기고 가는 것을 본다.

페이는 스튜어디스가 사촌오빠에게 맡기고 간 이별의 편지를 읽게 되고, 편지에서 경찰 663의 집 열쇠를 발견한다. 페이는 편지를 가져가지 않는 경찰 663에게 집주소를 알려 주면 편지를 우편으로 부쳐 주겠다고 말하고, 경찰 663의 집주소를 알아낸다. 그 후 페이는 경찰 663의 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하고 집 안을 새로 꾸미는 등, 집안에 남아 있는 스튜어디스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 나가고, 자신의 사랑으로 변화시켜 나간다.

다른 남자도 만나 보고 싶다는 스튜어디스에게 버림받은 경찰 663은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실연의 아픔을 달랜다. 하지만 자신의 집이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이상하게 느끼던 경찰 663은 낮에 집에 들렀다가 페이를 발견하고, 페이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음을 깨닫는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찾은 경찰 663은 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경찰 663은 술집 캘리포니아에서 페이를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리던 페이는 오지 않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매니저가 나타나 페이의 편지를 전해 준다. 페이는 항상 가고 싶어 했던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난 것이다. 경찰 663은 페이가 술집 캘리포니아를 진짜 캘리포니아로 착각했을 것이라며 또 다시 버림받은 자신을 위로한다. 또 다시 이별의 편지를 받은 경찰 663은 읽어 보지도 않은 채 휴지통에 버렸다가, 다시 돌아와 비에 젖은 편지를 말려서 읽는다. 편지에는 탑승 날짜가 1년 후이고, 목적지는 비에 씻겨져 읽을 수가 없는 이코노미 클래스 탑승권이 그려져 있다.

1년 뒤, 페이가 스튜어디스가 되어 나타난다. 페이는 1년 전처럼 비가 내리는 술집 캘리포니아에서 경찰 663을 생각한다. 그리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찾아간 페이는 경찰 663과 재회한다. 경찰 663은 페이에게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탑승권을 보여 주면서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를 묻는다. 페이는 새 탑승권으로 바꿔 주겠다며 경찰 663에게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묻자, 경찰 663이 대답한다. "아무 곳이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중경삼림'은 사랑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위로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두 이야기의 결말도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애인에게 버림받고 지독하게 외로워한다. 두 여자 주인공들 또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돈다. 하지만 경찰 223은 지쳐 잠든 그녀의 구두를 벗겨 깨끗이 닦아 주고, 그 보답으로 그녀는 외로운 그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페이는 경찰 663을 위해 그의 집에 남아 있는 옛사랑의 흔적들을 지워 주고, 자신은 그의 집에서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네 명의 남녀 주인공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본다. '중경삼림'을 보고 나면 미소가 흐르는 만족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그 만족은 새로운 사랑에 대한 작은 희망의 모습일 수도 있고, 삭막한 도시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 대한 작은 위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1994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중경삼림'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네 명의 남녀 주인공들을 통해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왕가위 감독과 자주 영화 작업을 같이한 크리스토퍼 도일이 '중경삼림'의 촬영을 담당했는데,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과 노출, 촬영 속도를 조절해서 만들어 내는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 기법을 통해 화려한 홍콩의 풍경을 파편화되고 왜곡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바꾸어 놓았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경찰 223은 그녀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새로운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지만, 경찰 223과 마약 밀매상인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반면에 두 번째 이야기에서 경찰 663과 페이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감을 관객들에게 안겨 준다. '중경삼림'은 홍콩 반환 뒤의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경삼림'은 스쳐지나감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경찰 223이 내레이션을 통해 말한다.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지나가지만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는 친구가 될 지도 모른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두 번째 이야기의 주요 인물들이 스쳐지나간다. 금발머리의 여자 마약 밀매상이 마약 밀수를 위해 인도인 일당과 함께 도착한 공항에서 스튜어디스가 스쳐지나가고, 금발머리의 여자 마약 밀매상이 장난감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커다란 인형을 들고 장난감 가게를 나오는 페이가 스쳐지나가며, 헤어진 애인의 전화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화가 난 경찰 223이 에스컬레이터를 역방향으로 뛰어올라갈 때 순찰 중인 경찰 663이 스쳐지나간다.

'중경삼림'은 원래 세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영화의 러닝 타임이 너무 길어져 세 번째 이야기만 따로 떼어서 제작된 영화가 '타락천사 (墮落天使, 1995)'이다.

금발머리의 여자 마약 밀매상을 연기하는 임청하는 결혼과 함께 은퇴를 선언해 '중경삼림'이 그녀의 마지막 출연작이 된 영화이다. '중경삼림'에서 첫 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 금발머리의 여자 마약 밀매상이 경찰 223에게 전해 주는 선물이 마치 임청하가 관객들에게 전해 주는 마지막 선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경찰 663을 연기하는 양조위는 '중경삼림'에서 부드러운 미소와 허무가 깃든 고독한 눈빛이 아주 매력적이다. 양조위는 '중경삼림'으로 '94 대만 금마장과 '95 홍콩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페이를 연기하는 왕정문은 '중경삼림'이 데뷔작인데, 왕가위 감독의 특별한 부탁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그리고 '94 스톡홀름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행운을 안았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나면 항상 귀에 맴도는 음악들이 있는데, '중경삼림'의 경우,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g'와, 캐나다의 포크 록 그룹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의 'Dreams'를 리메이크한 '몽중인 (夢中人)'이 그렇다. 'California Dreaming'은 캘리포니아에 가는 꿈을 꾸는 페이의 주제가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그녀는 항상 이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춤을 추곤 한다. 그리고 '몽중인'도 경찰 663과 사랑에 빠진 페이의 노래다. 영화배우보다는 가수로 더욱 유명한 왕정문이 '몽중인'을 직접 불렀는데,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독특한 음색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첫 번째 이야기에서 주크박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데니스 브라운(Dennis Brown)의 'Things in Life'와, 두 번째 이야기에서 경찰 663이 자신의 집에서 스튜어디스와 사랑을 나눌 때, 그리고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페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 흘러나오는 디나 워싱턴(Dinah Washington)의 'What a Difference a Day Made'도 귀에 맴도는 노래들이다.

Posted by unforget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