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는 신들로부터 불을 훔쳤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그는 바위에 사슬로 묶였고 영원히 고문을 당하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작, 각본, 연출을 담당한 '오펜하이머'의 원작은 2005년에 출간되어 2006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카이 버드와 마틴 J. 셔윈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이다. '오펜하이머'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도 나오지만,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대가로 카프카스의 바위에 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받게 된다. '오펜하이머'에서 닐스 보어(Niels Bohr, Kenneth Branagh)가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Cillian Murphy)에게 말한다. "... 자넨 미국의 프로메테우스야.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준 자. ..."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수행한 원자 폭탄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최초의 원자 폭탄을 만들었다.

'오펜하이머'에서 새로운 물리학을 공부하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가 버클리(Berkeley)의 방사선 연구소에 들렀을 때 실험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로렌스(Ernest Lawrence, Josh Hartnett)와 함께 가속기를 만들던 루이스 알바레즈(Luis Alvarez, Alex Wolff)가 이발소에서 이발하는 도중에 한달음에 버클리까지 뛰어가 오펜하이머에게 독일의 한과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원자핵을 쪼개는데 성공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1938년에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은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핵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일본에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까지 작성한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 Mate Haumann)는 1939년에 자신이 작성하고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Tom Conti)을 설득하여 서명하게 한 편지를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게 보내 나치 독일이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으니 우리도 폭탄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핵분열 연구를 조정하기 위해 우라늄 위원회(Uranium Committee)를 구성한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학생인 하트랜드 스나이더(Hartland Snyder, Rory Keane)와 함께 쓴 블랙홀에 관한 논문 '연속적 중력 수축에 관해 (On Continued Gravitational Contraction)'가 출판된 1939년 9월 1일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군사 목적의 과학 연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과학 연구 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의 국장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 Matthew Modine)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1941년 7월 16일자 메모에서 원자 폭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폭발물의 수천 배 이상의 파괴력을 가질 것이며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라늄 위원회 대신에 백악관 직속의 새로운 위원회(S-1 위원회(S-1 Committee))를 구성하고, 위원회의 의장으로 하버드 대학교 총장인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 Steve Coulter)가 임명된다.

'오펜하이머'에서 로렌스를 만나기 위해 버클리의 방사선 연구소에 나타난 부시와, 오펜하이머의 칼텍(Caltech) 동료 교수이자 나중에는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Matt Damon) 장군의 과학 자문관을 맡는 리처드 톨먼(Richard Tolman, Tom Jenkins)이 오펜하이머를 보고 난처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프로젝트 초기에 오펜하이머는 좌익 성향의 정치적 활동 때문에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에서 로렌스가 자신이 운영하는 방사선 연구소에 노조를 조직하려던 오펜하이머에게 이런 짓거리 때문에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수 없다면서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에 오펜하이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로렌스는 아서 콤프턴(Arthur Compton)을 설득하여 오펜하이머를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 자신이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좌절감에 빠졌던 오펜하이머는 노조 활동에서 완전히 손을 뗐고 공산당과의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로렌스와 콤프턴을 안심시킨다. 그리고 1942년 9월 18일부로 공식적으로 맨해튼 엔지니어 디스트릭트(Manhattan Engineer District, 맨해튼 프로젝트의 정식 명칭)의 지휘를 맡게 된, 당시 육군 대령이었던 그로브스는 햄버거 매점도 운영하지 못할 것 같은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어릴 때 처음 뉴멕시코를 여행한 후 샌타페이(Santa Fe) 외곽에 목장을 마련할 정도로 뉴멕시코의 아름다운 사막과 산악 지대와 사랑에 빠졌던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물리학과 뉴멕시코를 합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은 완벽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Los Alamos)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위한 비밀 연구소를 세우고 필요한 과학자들을 모집한다.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가 과학자들을 모집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에드워드 콘돈(Edward Condon, Olli Haaskivi), 도널드 호니그(Donald Hornig, David Rysdahl) - 그의 아내가 릴리 호니그(Lilli Hornig, Olivia Thirlby)이다 - 와 케네스 베인브릿지(Kenneth Bainbridge, Josh Peck),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Jack Quaid)이고, 우려하는 과학자(Brett Delbuono)로 등장하는 이름 없는 과학자는 오펜하이머처럼 좌익 배경을 가진 과학자들을 상징한다 - 우려하는 과학자가 오펜하이머에게 하는 말은 나중에 오펜하이머에게 닥칠 일을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1942년 12월 2일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Danny Deferrari)가 시카고 대학교의 스태그 필드(Stagg Field) 지하에 설치된 실험실에서 최초로 지속적인 핵분열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제어하는 데 성공한다. '오펜하이머'에서 최초의 원자로(시카고 파일-1(Chicago Pile-1))를 보여 주는 장면에서는 J. 어니스트 윌킨스(J. Ernest Wilkins, Ronald Auguste), 페르미, 실라르드를 볼 수 있다.

또한 '오펜하이머'에서 로스앨러모스의 기술 구역인 T-섹션의 과학자들로, 톨먼, 콘돈, 도널드, 베인브릿지, 파인만 등을 포함하여, 로버트 서버(Robert Serber, Michael Angarano)와, 나중에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Benny Safdie), 그리고 한스 베테(Hans Bethe, Gustaf Skarsgard),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George Kistiakowsky, Trond Fausa), 세스 네더마이어(Seth Neddermeyer, Devon Bostick) 등을 볼 수 있다 - 이시도르 라비(Isidor Rabi, David Krumholtz)는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 300년의 정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면서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를 끝내 거절했지만, 오펜하이머의 요청으로 오펜하이머의 컨설턴트가 되었고, 베테를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된 이후에도 이전의 좌익 활동 때문에 계속해서 육군과 FBI의 감시를 받고, 비밀 취급 인가를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슈발리에 사건은 나중에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로스앨러모스로 떠나기 전, 오펜하이머와 키티 오펜하이머(Kitty Oppenheimer, Emily Blunt) 부부는 친구인 슈발리에 부부를 버클리의 집으로 초대한다. 버클리 불문학 교수이자 공산주의자인 하콘 슈발리에(Haakon Chevalier, Jefferson Hall)는 부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건축가, 엔지니어, 화학자, 기술자 연맹(Federation of Architects, Engineers, Chemists and Technicians, FAECT) 노조 회합에서 오펜하이머도 만난 적이 있는 셸 개발 회사(Shell Development Company)의 화학자 조지 엘튼턴(George Eltenton, Guy Burnet)을 만났는데, 엘튼턴이 누군가가 나치 독일과 싸우고 있는 미국의 동맹인 소련에 넘겨주고 싶은 과학 연구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말한다.

얼마 후 로렌스가 버클리의 방사선 연구소와 오크리지(Oak Ridge)의 우라늄-235 생산 공장 사이의 연락책으로 임명한, 오펜하이머의 수제자 로시 로마니츠(Rossi Lomanitz, Josh Zuckerman)가 갑자기 징집되자, 이는 로마니츠가 방사선 연구소에 노조를 조직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 오펜하이머는 약 6개월 전에 자신의 부엌에서 엘튼턴에 대한 슈발리에와의 짧은 대화가, 당시에는 그건 반역 행위라고 말하고 더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이제 심각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엘튼턴을 신고하기로 마음먹고, 버클리를 방문했을 때 방사선 연구소 육군 보안 장교인 라이얼 존슨(Lyall Johnson, Jack Cutmore-Scott) 중위의 사무실을 찾아가 존슨에게 엘튼턴이라는 사람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날 로마니츠에 대해 존슨과 더 자세하게 의논하기 위해 존슨의 사무실을 찾은 오펜하이머는 보안 책임자인 보리스 패시(Boris Pash, Casey Affleck) 대령에게 엘튼턴에 대한 심문을 받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패시와의 만남에 당황한 오펜하이머는 친구인 슈발리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패시에게 엘튼턴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접근했고, 마이크로필름 사용에 능숙한 소련 영사관의 사람과 잘 알고 있었다는 등, 나중에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와 패시의 대화는 녹취되고 있었고, 나중에 루이스 스트로스(Lewis Strauss, Robert Downey Jr.)는 이 녹취록을 이용해 오펜하이머를 곤경에 빠뜨린다.

그로브스는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Gary Oldman) 대통령이 포츠담에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 총리와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기 전에 원자 폭탄 실험이 마무리되기를 원했다. '오펜하이머'에서 그로브스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 폭탄 실험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를 묻자, 오펜하이머는 존 돈(John Donn)의 소네트 중 "나의 심장을 쳐라, 삼위일체의 신이여."라는 구절을 읊으면서 "트리니티. (Trinity.)"라고 답하는데, 이는 오펜하이머가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으로, 힌두교 교리에서의 삼위(트리니티)는 창조자 브라마, 보존자 비슈누, 그리고 파괴자 시바를 말한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오펜하이머는 신비로운 버섯구름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만든 원자 폭탄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실제로 사용되자 죄책감에 시달린다.

1946년 8월 1일 트루먼 대통령은 핵 에너지 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민간인으로만 이루어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에 주도록 제안한 원자력 에너지 법안(Atomic Energy Act)에 서명을 하고, AEC와 자문 위원회(General Advisory Committee, GAC)를 설치하는데, GAC의 의장이 된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국제 통제를 통한 핵무기 확산의 제한을 주장한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AEC의 위원인 스트로스는 소련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슈퍼 폭탄(수소 폭탄)의 개발을 제안하지만, 오펜하이머와 GAC 위원들은 슈퍼 폭탄의 개발에 반대하고, 대신에 무기 통제를 제안한다.

1949년 6월 초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 합동 위원회(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에서 노르웨이에 방사성 동위 원소를 수출하는 문제로 증언을 하는데, 방사성 동위 원소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위원들 중 유일하게 수출에 반대표를 던진 스트로스를 본의 아니게 웃음거리로 만든다.

1950년 2월 1일 트루먼 대통령이 결국 수소 폭탄 개발 계획을 발표한 다음날, FBI의 국장인 J.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는 스트로스에게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영국이 원자 폭탄의 조속한 개발을 위해 로스앨러모스에 파견하여 내파 팀에서 일했던 독일 출신의 영국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 Christopher Denham)가 폭탄에 관한 기밀 정보를 소련에 넘겨주는 첩보 활동을 자백했다고 알려 준다. 푹스 사건은 비록 오펜하이머가 푹스를 로스앨러모스로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FBI에게 오펜하이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1953년 무렵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된다. 미국의 핵 능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워싱턴의 권력자들은 미국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펜하이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빨갱이 사냥" 매카시 선풍의 장본인인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 의원은 오펜하이머를 조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오펜하이머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 스트로스는 후버에게 오펜하이머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너무 성급하게 일을 진척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스트로스의 말에 동의한 후버는 매카시 상원 의원에게 오펜하이머 같이 만만치 않은 인물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1953년 7월 AEC의 의장으로 영전한 스트로스는 AEC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오펜하이머에게 받은 멸시와 모욕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모든 정부 자문 위원회로부터 축출하려는 계략을 꾸민다. 즉,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가 곧 만료가 되는데, 오펜하이머를 국가 안보에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해 온, 원자력 에너지 합동 위원회의 전직 직원이자 맹렬한 반공주의자인 윌리엄 보든(William Borden, David Dastmalchian)에게 스트로스에게 넘겨받은 오펜하이머의 보안 파일을 검토해서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첩보 요원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결론을 내린 편지를 작성해 후버에게 보내게 하고, 그로브스의 전시 부관이었나 이제는 AEC의 총괄 매니저인 케네스 니콜스(Kenneth Nichols, Dane DeHaan)에게는 오펜하이머의 좌익 활동과 슈발리에 사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정책 제안 및 수소 폭탄 개발에 대한 반대 등을 검토해 본 결과, 그가 보안 위험 인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의 고발장을 쓰게 하고 오펜하이머에게 비밀 취급 인가 갱신이 취소될 것임을 알리게 한다. 만약에 오펜하이머가 사임하지 않고 항소한다면, 오펜하이머에 대한 AEC 보안 청문회를 위한 세 명의 위원회 위원들로, 오펜하이머의 좌익 활동이 드러나기만 하면 그의 성실성에 의구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 즉 위원회 의장으로 고든 그레이(Gordon Gray, Tony Goldwyn)와, 토마스 모건(Thomas Morgan, Kurt Koehler), 그리고 워드 에반스(Ward Evans, John Gowans)를 임명하고, 사나운 반대 심문에 능한 공격적인 법정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한 로저 롭(Roger Robb, Jason Clarke)을 검사로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청문회를 준비할 수 있도록 롭과 그레이 위원회에게는 오펜하이머의 보안 파일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 취급 인가를 내줄 것이지만, 오펜하이머의 변호인에게는 비밀 취급 인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한 오펜하이머에 대한 불만으로 오펜하이머를 정부 관련 업무에서 제외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고 말한 텔러나,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무엇보다도 톨먼의 아내 루스 톨먼(Ruth Tolman, Louise Lombard)과 불륜을 저지른 오펜하이머에 진절머리가 난 로렌스와 같이 오펜하이머에게 적대적인 증인들을 모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변호인으로 로이드 개리슨(Lloyd Garrison, Macon Blair)을 선임하여 항소하지만, 오펜하이머에 대한 AEC 보안 청문회는 스트로스에 의해 기획된, 처음부터 공정하지 못한 "재판"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레이 위원회는 2 대 1의 투표 결과로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 갱신을 취소하도록 권고하는 의견서를 AEC에 제출하고, 스트로스가 의장인 AEC의 위원들은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 갱신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린다.

오펜하이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이야기가 시간적 순서로 전개되는 '오펜하이머'의 원작과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영화의 극적 구성을 위해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전개된다. "핵분열 (Fission)"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첫번째 이야기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AEC 보안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과거를 진술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핵융합 (Fusion)"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두번째 이야기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에 의해 상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스트로스에 대한 상원 위원회의 인사 청문회에서 스트로스가 프린스턴(Princeton)의 고등 연구소의 이사 자격으로, 고등 연구소의 소장직 제의를 받은 오펜하이머를 만난 1947년부터 자신과 오펜하이머와의 관계에 대해 진술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핵분열"의 이야기를 다루는 장면은 컬러로, 스트로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핵융합"의 이야기를 다루는 장면은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는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의 경우 누구의 관점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원자 폭탄은 핵분열에 의해, 수소 폭탄은 핵융합에 의해 폭발하는데, "핵분열"은 주로 원자 폭탄의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핵융합"은 수소 폭탄의 개발 관련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오펜하이머'의 원작에서 스트로스에 대한 인사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의 AEC 보안 청문회가 중대한 이슈로 대두되었고, 기나긴 싸움 끝에 스트로스는 낙마했다고 짧게 언급되긴 하지만, '오펜하이머'에서처럼 스트로스의 인사 청문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펜하이머'에서 스트로스의 인사 청문회에 나와 스트로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물리학자 데이비드 힐(David Hill, Rami Malek)은 '오펜하이머'의 원작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에서 스트로스는 인사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가 AEC 보안 청문회에서 당했던 대로 당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인과응보의 통쾌함을 안겨 준다. 실제로 오펜하이머에 대한 스트로스의 계략은 장기적으로 볼 때 역효과를 낳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AEC 보안 청문회가 얼마나 종교 재판처럼 진행되었는지, 매카시 시대에 정의가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를 알게 되었고, 스트로스는 동료들의 신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 경력도 끝장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원작은 부제목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이 말해 주듯, 오펜하이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경험과 행동에 대한 저자의 논평을 겸한 전기이다. '오펜하이머'에서는 영화 매체 특성상 논평에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또한 원작의 방대한 내용을 상영 시간이 세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영화에 담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오펜하이머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핵분열"의 이야기와, 오펜하이머의 내면에 영향을 주는 외부의 이야기를 하는, 스트로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핵융합"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구성 방식을 통해, 원작의 방대한 내용을 - 조금은 복잡하긴 하지만 - 밀도 있게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펜하이머의 모순적인 행동을 최대한 조명하여 분석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가히 모순적인 인물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원자 폭탄의 개발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으나, 곧바로 원자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핵무기에 대한 모순적인 행동뿐만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천재적인 과학자였으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는 지도 교수인 패트릭 블래킷(Patrick Blackett, James D'Arcy)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불만으로 실험실의 화학 약품을 이용해 만든 독을 사과에 발라 블래킷을 죽일 뻔하기도 하였고, 키티와 결혼을 한 후에도 이전의 연인이었던 진 태틀록(Jean Tatlock, Florence Pugh)을 만나고, 친구인 톨먼의 아내인 루스와 불륜마저 저질렀다.

"Mr. President, I feel that I have blood on my hands."

(대통령 각하,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오펜하이머'의 원작을 읽어야 한다. '오펜하이머'의 원작을 읽고 '오펜하이머'를 보면 '오펜하이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자세한 배경과, 영화에서는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오펜하이머'에서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AEC 보안 청문회에서 자신이 AEC의 위원이라면 오늘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증언하는데,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그로브스가 오펜하이머에게서 갑자기 등을 돌린 이유를 '오펜하이머'에서는 알 수 없지만, '오펜하이머'의 원작에서는 그 이유가 스트로스가 미리 그로브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닥칠 것임을 명확히 해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944년 1월 5일 진의 아파트를 찾은 진의 아버지 존 태틀록(John Tatlock)은 욕조 끝에서 베개 더미 위에 누워서 반쯤 채워진 욕조에 머리가 잠긴 진의 시체를 발견한다. 당시 진의 죽음은 동기가 불분명한 자살로 결론 났는데, 진의 오빠 휴 태틀록(Hugh Tatlock)과 몇몇 수사관들은 진의 죽음에 의문점이 많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도 언급하지만, 진이 죽기 전 남긴 것으로 추측되는 노트에 진의 서명이 없다는 점과, 부검 결과 수면제인 바르비투르산염과 함께 그녀의 혈액에서 강력한 마취제인 포수 클로랄(chloral hydrate)이 발견된 점 등으로 미루어 타살의 가능성을 주장한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원작은 진의 죽음이 타살에 의한 것이라면 그 배후로 당시 오펜하이머를 조사하던 방첩 장교 패시를 조심스레 언급하고 있다.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가 키티에게 진의 죽음을 전하는 장면에 죽기 직전의 진을 보여 주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삽입 장면들 중에 욕조물에 잠긴 진의 머리를 내리누르는 장갑 낀 손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이 짧은 삽입 장면을 통해 '오펜하이머'에서도 진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는 '오펜하이머'의 원작에 비교적 충실하다. '오펜하이머'의 대사도 원작에서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에 사실과 다른, 왜곡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펜하이머'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이 청산칼리를 주사한 사과를 보어가 먹으려던 찰나 벌레 먹은 사과라면서 사과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넘어가지만, 실제로는 보어가 이 일에 연루되지는 않았으며, 오펜하이머의 아버지 율리우스 오펜하이머(Julius Oppenheimer)가 형사 처벌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고, 기나긴 협상 끝에 오펜하이머를 기소유예 상태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는 선에서 간신히 일이 무마되었다. 또한 '오펜하이머'에서는 텔러가 계산한, 핵무기를 폭발시켰을 때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는 끝없는 연쇄 반응의 가능성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찾아가는데, 실제로는 '오펜하이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콤프턴을 찾아갔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시작과 끝에 오펜하이머가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의 이야기를 위해 만든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많이 제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도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잘 알려진 유명한 과학자들이거나 정치인들이어서, 과학, 특히 물리학을 전공했거나 당시의 역사를 잘 아는 관객들은 그나마 혼란을 덜 느낄 것이다. '오펜하이머'에 유명한 과학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블래킷, 보어, 아인슈타인, 라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Matthias Schweighofer), 로렌스, 알바레즈, 파인만, 베테, 페르미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다. 그리고 전쟁부 장관의 사무실에서의 회의 장면에서는 오펜하이머, 페르미, 로렌스, 그로브스, 부시를 포함하여,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 James Remar), 육군 참모 총장 조지 C. 마샬(George C. Marshall, Will Roberts),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James Byrnes, Pat Skipper), 코넌트를 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인간에게 원자 폭탄이라는 불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의 끔찍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워싱턴의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형벌을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당시 미국을 휩쓴 매카시 선풍의 최대 희생자였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했던 오펜하이머는 여생을 책임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책임감과 죄책감에 대한 나의 감정은 항상 현재에 발을 딛고 있었고,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도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남아나질 않더군."이라고 썼다. 오펜하이머는 1960년에 도쿄를 방문했을 때 기자들에게 자신의 애매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나는 원자 폭탄의 기술적 성공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유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에서 스트로스가 자신의 상원 보좌관(Alden Ehrenreich)에게 오펜하이머는 사소한 인간들에게는 참을성이 없었고 자신에게도 무자비하게 대했다면서 원자력 에너지 합동 위원회에서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 이야기를 해 주는 장면에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 (Amadeus, 1984)'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Tom Hulce)의 천재성을 질투해 모차르트를 파멸로 몰아가는 안토니오 살리에르(Antonio Salieri, F. Murray Abraham)를 생각나게 한다. 스트로스는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에서 오펜하이머와 이야기를 나눈 아인슈타인이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간 것이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끝에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사소한 인간인 스트로스는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핵무기의 확산을 걱정하는 보다 차원 높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오펜하이머'의 끝에서도 보여 주듯, 1963년 12월 2일에 린던 존슨(Lyndon Johnson, Hap Lawrence)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한다. 이날 시상식에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AEC 보안 청문회에 고소인 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이 나라의 중요한 관심사를 내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었던 텔러와 그래도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키티는 굳은 얼굴로 오펜하이머의 뒤에 서 있었다.

2024년 3월 10일에 열린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로 드디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루이스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작품상을 포함하여,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의 7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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