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일 때, 지금의 EBS의 전신인 KBS 3TV에서 일요일 정오마다 방송되는 '세계 명작 감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DVD는 물론이고 비디오도 없던 당시에는 이 프로그램이 오래된 명화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정어린 설득'은 이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였는데, '세계 명작 감상'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이 영화가 생각이 날 정도로 정말 자주 방송되었던 영화이다.

'우정어린 설득'은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과 '벤허 (Ben-Hur, 1959)'로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작품으로, Jessamyn West의 소설 'The Friendly Persuasion'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우정어린 설득'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인디아나 남부의 한 퀘이커 교도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평화주의자들로 유명한 퀘이커 교도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큼 영화 또한 등장 인물들간의 갈등이나 이야기의 긴장감 하나 없이 잔잔하게, 굉장히 평화롭게 전개된다. 영화의 극적 구성을 위한 이렇다 할 특별한 이야기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퀘이커 교도 가족의 살아가는 단순한 이야기들을 따뜻한 유머만으로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연출력은 거장의 연출력다운 탁월함을 보여 주고 있다.

'우정어린 설득'은 개신교의 한 종파인 퀘이커를 단지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의 작은 설정 정도로 영화에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퀘이커의 이야기이다. 독실한 퀘이커 교도인 엄마 일라이자(Dorothy McGuire)와 덜(?) 독실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퀘이커의 종교관과 퀘이커 교도의 생활을 꽤 자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Friendly Persuasion'이라는 영화의 제목부터가 퀘이커적이다. 영화를 보면 영화의 제목과 영화의 이야기가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퀘이커의 원래 명칭이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종교 친우회)"라는 것과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퀘이커 교도들은 스스로나 타인을 "Friends"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이 영화의 제목의 의미와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Friendly Persuasion'은 퀘이커의 정신, 특히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퀘이커의 평화주의와 휴머니즘의 설득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한 종파의 이름이 되었지만, 원래 "퀘이커"는 일반인들이 퀘이커 교도들을 조롱하기 위해 불렀던 이름인데, 퀘이커 교도들은 이러한 조롱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스스로 자신들을 "퀘이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퀘이커 교도들의 타인에 대한 겸손은 작은 표현에서도 나타나는데, 영화의 초반부에 제스(Gary Cooper)가 길을 묻는 남자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퀘이커 교도들은 상대방을 지칭할 때 "you(당신)" 대신 "thee(그대)"를, "thank you(감사합니다)"도 "thank thee"라고 표현한다.

퀘이커는 누구에게나 내면의 빛(하느님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과의 교감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퀘이커는 개신교의 다른 종파와는 달리 묵상으로 예배를 올리는데, 영화에서도 퀘이커와 감리교의 서로 다른 예배 모습을 재미있게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보여 주듯, 퀘이커는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믿기에 예배를 이끌어가는 사제나 성직자도 따로 두지 않는다.

퀘이커는 묵상을 통한 내면으로부터의 신적 체험을 믿기에, 이를 방해하는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도 거부한다. 영화에서도 제스가 오르간을 집에 들이려 하자 일라이자가 이를 반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퀘이커의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장면이다.

퀘이커는 특히 폭력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비폭력주의와 평화주의로 유명하다. 가족과 함께 축제에 놀러간 큰 아들 조시(Anthony Perkins)가 다른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도 싸우지 않고 맞기만 하는 장면에서도 보여 주듯이 퀘이커 교도들은 철저하게 비폭력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가족의 안전을 위협해오는 남부 연합군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의용군에 들어가려는 조시와 이를 말리는 일라이자의 이야기에서도 보여 주듯이 퀘이커 교도들은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평화주의의 신념에 따라 전쟁을 반대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실천하고 있다. 심지어 퀘이커는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하여 다른 사람과의 경쟁도 금기시하고 있는데, '우정어린 설득'에서 가장 재미있는, 제스가 그의 친구 샘(Robert Middleton)과 안식일마다 벌이는 말 경주와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일라이자의 이야기는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반인들, 특히 오늘날의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엄격하고, 현대 사회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약간은 모순된, 그리고 인간의 본능마저 무시하는 듯한 퀘이커가 현시대와는 맞지 않는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끔 한다. 그러나 퀘이커의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 휴머니즘은 현시대에도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우정어린 설득'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남부 연합군의 한 군인을 오히려 살려 보내는 '우정어린 설득'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우정어린 설득'은 작품상을 포함, 감독상, 각색상 등 6개 부문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지만 단 한 개의 아카데미상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큰 아들 조시 역의 안소니 퍼킨즈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 (Psycho, 1960)'에서 인간 괴물 노만 베이츠(Anthony Perkins)를 연기한 그 배우이다. 안소니 퍼킨즈는 그의 두번째 영화 출연작인 '우정어린 설득'에서의 조시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오르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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