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린든'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배리 린든' 직전에 연출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와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 그리고 '배리 린든' 직후에 연출한 '샤이닝 (The Shining, 1980)'과 같은 걸작들을 한창 연출하던 시기에 연출한 영화이지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저평가를 받았던 영화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시계태엽 오렌지', '샤이닝'이 워낙 개성이 강한 영화들이었던 만큼, 18세기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 그리고 상영 시간이 3시간이나 되는, 거기에다 단조롭게 전개되는 영화의 이야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배리 린든'은 영화에 숨겨져 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심오한 연출 의도가 알려지면서 지금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배리 린든'은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 간행하는 영화 전문 월간 잡지 'Sight & Sound'가 2022년에 발표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The Greatest Films of All Time)"에서 45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오히려 243위에 랭크되어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나, 88위에 랭크되어 있는 '샤이닝'보다도 훨씬 높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6위에 랭크되어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제작과 연출까지 담당한 '배리 린든'의 원작은 찰스 디킨스와 함께 빅토리아 중기인 1830~40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배리 린든의 행운: 지난 세기의 로맨스 (The Luck of Barry Lyndon: A Romance of the Last Century)'라는 제목으로 1844년 1월부터 12월까지 '프레이저스 매거진 (Fraser's Magazine)'이라는 잡지에 처음 연재되었으며, 1856년에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The Memoirs of Barry Lyndon, Esq.)'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배리 린든'은 내레이터(Michael Hordern) 마이클 호던의 친절한 내레이션으로 주인공 배리 린든(Ryan O'Neal)의 삶을 따라간다. 배리 린든의 원래 이름은 레드먼드 배리인데, 나중에 그는 찰스 린든 경(Frank Middlemass)의 미망인 레이디 린든(Marisa Berenson)과 결혼한 후, 그의 이름에 사랑스러운 레이디의 이름을 붙여 써도 좋다는 국왕 폐하의 하해와 같은 허락을 받아 내 배리 린든이라는 칭호와 직함을 획득하게 된다. '배리 린든'의 이야기는 1부와 2부,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의 제목 또한 "레드먼드 배리가 배리 린든의 칭호와 직함을 획득한 방법"이다.

'배리 린든'의 원작 소설은 악한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악한 소설은 협잡꾼, 무뢰배로 정의될 수 있지만 잔재주가 뛰어나고 매력도 있는 인물이 세상에서 겪는 일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자신의 소설을 "영웅 없는 소설"이라고 표현한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아일랜드의 몰락한 젠트리 집안의 아들 레드먼드 배리라는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서 중산 계층의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첫사랑을 빼앗은 잉글랜드인 장교와 결투를 벌이다가 장교에게 상해를 입혀 도주를 하던 레드먼드 배리는 설상가상으로 사기꾼 부부 - 영화에서는 노상강도(Arthur O'Sullivan) - 에게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고 군에 입대한다. 우여곡절 끝에 군에서 벗어난 뒤에는 도박과 사기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유럽 전역의 사교계를 누빈다. 그렇게 상류 사회에 진출한 레드먼드 배리는 막대한 부와 뛰어난 미모를 가진 린든 여백작, 잉글랜드 불링던 여자작이자 아일랜드 왕국 린든 성의 여남작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이름까지 배리 린든으로 바꾸고 허영으로 가득 찬 생활을 누리지만, 속물근성과 출세주의에 젖은 그의 삶은 점점 파멸로 향한다. 배리 린든이 파멸로 향하는 이야기는 '배리 린든'에서도, 특히 2부 "배리 린든에게 닥친 불행과 재앙에 대한 이야기"에서 잘 보여 준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주로 하층민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해피엔드를 맞이하는 이야기로 서민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달래 준 찰스 디킨스 식의 이상적인 소설 세계를 그려내는 대신, 주로 허영과 위선에 물든 중산층 인물이 출세를 지향하다가 결국 비극적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로 천박한 세태를 풍자하는 리얼리즘적 소설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자신의 소설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여 재구성하는 역사 소설의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기존의 소설 속 영웅적 존재가 아닌, 현실 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결점투성이의 인간이 인류의 역사라는 노도에 때로는 휩쓸리기도 하고 때로는 맞서기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 본성을 그려냈다.

'배리 린든'에서 레이먼드 배리는 유럽의 열강들이 모두 참전한 그 유명한 7년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으로 운명처럼 내몰린다. 레드먼드 배리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았던 친구 그로건 대위(Godfrey Quigley)가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죽자, 레드먼드 배리는 군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탈영하기로 마음먹는다. 레드먼드 배리는 전쟁 속에 휘말린 일개 개인의 삶이 그 속에서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본 것이다. 내레이터가 말한다. "집에서 아늑한 안락의자에 앉아 영광스러운 전쟁을 꿈꾸기는 쉽다. 하지만 직접 전쟁을 보는 것은 많이 다르다. ... 신사들은 기사도 시대를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지휘한 일자무식한 농군들, 침입자들과 소매치기들을 기억하시라. 이런 짐승들을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여 당신들의 위대한 전사들과 제왕들은 세상에서 온갖 살상 행위를 저질러 왔다." - 이어지는 장면에서 레드먼드 배리는 물을 길으러 강에 가는데, 그곳에서 두 명의 동성애자들을 발견한다. 두 동성애자들 중 한 명의 이름이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의 이름과 같은 프레더릭(Frederick)이다. 7년 전쟁을 일으킨 프리드리히 대왕을 조롱하고 있다.

내레이터의 내레이션은 인간이란 전쟁, 정치처럼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사회라는 거대한 풍랑 속에서 이용, 희생될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배리 린든'에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역사나 사회라는 풍랑 속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라는 주제를 운명이라는 풍랑 속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라는 주제로 확장한다. '배리 린든'에서 라이언 오닐이 연기하는 배리 린든을 주의 깊게 보면, 자신에게 닥친 어떠한 일에도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고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배리 린든이 그나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때는 그로건 대위가 전사했을 때와, 아들 브라이언(David Morley)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죽었을 때 뿐이다. 도박을 할 때도, 결투를 할 때도, 레이디 린든과 결혼을 할 때도, 심지어 처음부터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양아들, 작고한 찰스 린든 경의 아들, 불링던 경(Leon Vitali)과의 결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을 때도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무덤덤하다. 배리 린든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운명이라는 듯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배리 린든뿐만이 아니라 레이디 린든도 마찬가지다. 레이디 린든은 마치 운명이라는 괴뢰사가 부리는 듯한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인다. 게다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관객들이 배리 린든에게 어떠한 감정 이입도 할 수 없도록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나마 관객들이 배리 린든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때는 헨델의 '사라방드 (Sarabande)'가 장엄하게 흐르는 가운데 브라이언의 장례 행렬을 보여 주는 때 뿐이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연출 의도를 알지 못하고 영화를 보면 영화의 이야기 전개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가 단조롭게 느껴지는 데에는 내레이터의 내레이션도 한몫한다. 원작 소설은 악한 소설의 특징을 극대화하기 위해 회고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회고록은 특성상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독자들이 결점으로 가득한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을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배리 린든'에서 내레이터 역을 배리 린든을 연기하는 라이언 오닐 대신 마이클 호던에게 맡겨, 관객들이 배리 린든에게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거기에다 내레이터는 배리 린든에게 닥칠 일들을 - 이 모든 일들이 배리 린든의 운명이라는 듯 - 관객들에게 미리 알려 주어 영화의 극적 효과를 원천 차단한다. 첫사랑 노라(Gay Hamilton)와 약혼한 비겁한 퀸 대위(Leonard Rossiter)와의 결투에서 이긴 레드먼드 배리가 어머니(Marie Kean)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 내레이터는 레이먼드 배리가 집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고한다. "노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퀸 대위의 얼굴에 와인을 던지지 않았다면, 배리의 운명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방랑자가 될 운명이었다."

더블린으로 도주 중인 레이먼드 배리는 주막에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레드먼드 배리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바로 주막을 떠남으로써 요행히 강도를 당하는 것을 면하지만, 결국에는 노상강도인 그 남자를 길에서 다시 만나고, 그에게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고 만다. 이렇듯 어느 누구도 운명을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을 세상에 버리고 가야 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다. '배리 린든'은 에필로그에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전술한 인물들이 살아가고 다투던 시기는 조지 3세 시대였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잘생긴 사람이든 추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이제는 모두가 평등하다."

이렇듯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원작을 영화로 각색할 때 원작의 이야기와 주제를 그대로 가져오는 법이 없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원작보다 더 심오한 주제와 이야기로 업그레이드하여 원작과는 또 다른 자신만의 차별성이 있는 영화로 만들어 버린다. '배리 린든'뿐만 아니라, 안토니 버지스의 소설을 각색한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그랬고,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샤이닝'에서도 그랬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다.

'배리 린든'은 시각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극단을 보여 주는 영화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인공조명이 없던 18세기 유럽의 풍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인공광을 제거하고 자연광만으로 촬영을 하는 획기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미국 항공 우주국(NASA)에서 구입한 우주 탐사용 렌즈를 개조하여 만든 카메라를 사용하여 전적으로 촛불만으로 이루어진 실내 장면들을 촬영하였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시종일관 인상주의 회화의 느낌을 주는 매혹적인 장면들을 보여 준다. 실제로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배리 린든'의 매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기 위하여 영국의 풍속과 사회상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17~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의 작품을 모방하기도 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배리 린든'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을 연출한 이유는 영화에 등장하는 결점투성이의 인간들을 작고 하찮은 존재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배리 린든'에서 배리 린든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점점 줌 아웃이 되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작아져 버린 배리 린든을 보여 주는 롱 숏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아름다운 풍광 속의 배리 린든을 작고 하찮은 존재로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떠나가고 점점 고립되어 가는 외로운 배리 린든을 표현한다. '배리 린든'은 4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다.

또한 '배리 린든'이 역사 소설이 원작인 역사 영화인 만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고증을 통하여 18세기 유럽의 풍속과 무대를 재현하였다. '배리 린든'은 아카데미 미술상과 아카데미 의상상도 수상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클래식 음악을 아주 잘 활용한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배리 린든'에서도 바흐, 헨델, 모차르트, 파이지엘로, 슈베르트, 비발디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중에서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장엄하게 흘러나오는 헨델의 '사라방드'와, 배리 린든이 레이디 린든을 처음 만나고 교제를 시작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Piano Trio in E-Flat, Op.100', 배리 린든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레이디 린든이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Cello Concerto in E-Minor'가 유명하다. 레이먼드 배리가 영국 장교의 군복과 신분 증빙 서류를 훔쳐 군대를 탈영하고 영국군이 점령한 영토를 벗어나 프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들어서는 장면에서, 그리고 길에서 만난 프러시아 장교 포츠도르프 대위(Hardy Kruger)의 초대에 응하고 그를 따라나서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곡한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 (Hohenfriedberger March)'이다. 아일랜드의 전통 민속 밴드인 The Chieftains가 연주하는 아일랜드 전통 음악 - 'Women of Ireland', 'Piper's Maggot Jig', 'The Sea-Maiden' - 도 영화에 삽입되어 있다. '배리 린든'은 아카데미 음악상도 수상했다.

Posted by unforget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