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죽었거나 정신을 잃은 듯한 한 여자를 태운 비행기가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화염에 휩싸인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남자는 우연히 추락한 비행기를 지나가던 아랍인들에 의해 구출된다. 이태리의 야전 병원에서 캐나다인 간호사 한나(Juliette Binoche)의 간호를 받게 된 남자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고, 단지 그가 구사하는 영국식 발음으로 그가 영국인이라는 것만 추측할 뿐이다.
한나는 이동하기조차 힘들어 하는 영국인 환자를 위해 영국인 환자와 함께 버려진 수도원에 남아 영국인 환자를 간호하기로 한다. 둘만이 있는 수도원에 어느날 갑자기 카라바지오(Willem Dafoe)라는 의문의 사나이가 나타나 수도원에 머무르게 된다. 카라바지오에 이어, 터번을 두른 인도인 폭탄 전문가 킵(Naveen Andrews)과 그의 부하 하디(Kevin Whately)가 길에 묻혀 있는 지뢰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위해 수도원에 머무르게 된다.
마이클 온다티에의 동명의 소설을 안소니 밍겔라 감독이 각색을 하고 연출까지 한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이태리의 한 버려진 수도원에서의 이야기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가 절묘한 교차 편집으로 나란히 전개되는 영화이다. 영국인 환자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카라바지오와, 자신의 유일한 소지품인 가죽 장정의 두꺼운 책 속에 끼워져 있는 편지와 사진, 직접 그린 지도와 그림들이 던져 주는 단서들로 비행기 사고를 당하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이야기를 통해 영국인 환자가 누구인지, 비행기에 같이 타고 있던 여자는 누구인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두 사람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리고 카라바지오란 사나이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들을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 풀어 나간다.
영국인 환자는 자신이 헝가리인 백작 알마시(Ralph Fiennes)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사하라 사막에서 사막 탐사에 동참한 제프리 클리프턴(Colin Firth)과 그의 아내 캐서린 클리프턴(Kristin Scott Thomas)을 만난 것도 기억해낸다. 그리고 캐서린 클리프턴과의 사랑도 기억해낸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사랑, 이별, 상처, 그리고 구원에 관한 영화이다. 뜨거운 사하라 사막에서 시작된 캐서린과의 사랑 뒤에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마시는 전신에 입은 화상보다도 더 큰 마음의 상처로 고통스러워 한다. 한나에게도 아픔이 있다. 한나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 나가자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졌다고 생각을 한다. 한나는 마치 알마시를 살려냄으로서 자신의 아픔을 덜어내려는 듯 알마시를 헌신적으로 간호한다. 킵과 사랑에 빠진 한나는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로 인해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는 킵마저 잃을까 불안해 한다.
알마시는 자신의 고통스런 사연을 카라바지오에게 이야기해 준 후 죽음을 택함으로서 고통에서 벗어난다. 자신이 헌신적으로 간호한 알마시를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냈지만, 고통에서 벗어난 듯한 알마시를 본 한나는 비로소 자신의 아픔도 털어낸다.
알마시(Laszlo de Almasy)는 실존 인물이다. 제프리 클리프턴과 그의 아내 캐서린 클리프턴 또한 실존 인물인 로버트 클레이튼 경(Sir Robert Clayton)과 그의 아내 도로시 클레이튼(Dorothy Clayton)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실제로 사막 탐험가였던 알마시는 로버트 클레이튼 경과 함께 사하라 사막을 탐사했으며, 영화에서처럼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 (The Cave of Swimmers)"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실존 인물들이긴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전부 픽션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알마시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동성연애자였는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암시라도 하려는 듯 알마시와 함께 사막 탐사를 하는 동료들을 동성연애자처럼 묘사해 놓았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작품상을 포함하여,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등 9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이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스펙터클한 화면과, 전쟁을 배경으로 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가 마치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특히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 (Doctor Zhivago, 1965)'를 많이 연상시킨다.
개인적으로 불륜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우기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닥터 지바고'에도 큰 감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닥터 지바고'는, 물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원작과는 달리 유리 지바고(Omar Sharif)와 라라(Julie Christie)의 사랑 이야기를 너무 부각시켜 불륜극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의 격동 속에서 사회의 변혁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유리 지바고의 고뇌하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유리 지바고의 라라에 대한 사랑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했었다. 하지만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경우, 물론 알마시가 캐서린을 잃은 것이 전쟁 때문이긴 하지만 전쟁은 단지 이야기의 배경일 뿐, 알마시가 전쟁에 대해 고뇌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닥터 지바고'에 비하면 100% 순수 불륜극이다.
영화에는 큰 감명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다. 한나의 사랑을 받아들인 킵이 한나에게 오래된 성당 안의 벽화를 보여 주는 장면과, 비 오는 날 한나와 카라바지오, 킵, 하디가 얼굴에 비를 맞아 보고 싶다던 알마시를 들것에 싣고 어린 아이들처럼 빗속을 뛰어다니는 장면이다. 물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캐서린 클리프턴 역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전라를 보여 주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알마시 역의 랄프 파인즈와 캐서린 클리프턴 역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각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둘 다 수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나 역의 줄리엣 비노쉬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윌렘 데포가 카라바지오 역을,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2010)'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콜린 퍼스가 제프리 클리프턴 역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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