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투 선수가 경기 직전 링 위에서 몸을 풀고 있다. 링 밖의 관중석에는 수많은 관중들이 있는 듯하지만 자욱하게 낀 안개로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만 보인다. 권투 선수는 마치 경기장에 혼자 있는 듯 쓸쓸해 보인다. 권투 선수는 수많은 관중들과 기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헛된 꿈처럼 느껴진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의 간주곡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분노의 주먹'의 오프닝 장면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이를 좀더 명확하게 해준다. 한때 권투 선수였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비대해진 제이크 라 모타(Jake La Motta, Robert De Niro)가 이번에는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무대에 서기 직전에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장면은 다시 23년 전의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링 위의 제이크 라 모타를 보여준다. '분노의 주먹'은 유명한 권투 선수에서 쓸쓸한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전락한 제이크 라 모타의 인생을 다룬 영화이다.
'분노의 주먹'은 권투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권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라 모타와, 그의 동생이자 매니저인 조이(Joe Pesci)가 라 모타의 체중에 관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분노의 주먹'을 권투 영화로 만들 만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권투 경기 또한 승패에는 관심이 없다. '분노의 주먹'에서의 권투 경기는 라 모타의 괄기, 성적 질투, 분노, 좌절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의처증이 심해져가는 라 모타는 아내 비키(Cathy Moriarty)가 무심코 잘 생겼다고 한 상대 선수(Tony Janiro, Kevin Mahon)의 얼굴을 링 위에서 무참하게 뭉개버린다. 상대 선수가 다운되어 일어나지 못하자 라 모타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링을 돌면서 관중석에 있는 비키를 쳐다본다. 다른 남자에게 한눈팔지 말라는 비키에 대한 무언의 경고인 것이다.
'분노의 주먹'은 실제 권투 선수였던 라 모타의 자서전 'Raging Bull: My Story'이 원작인 영화이긴 하지만, 전기 영화도 아니다. '분노의 주먹'은 라 모타의 인생을 통해 한 남자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분노의 주먹'을 이야기할 때마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록키 (Rocky, 1976)'가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권투를 소재로 한 이 두 영화의 이야기가 서로 완벽한 대척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록키'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인 록키 발보아(Sylvester Stallone)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분노의 주먹'은 실제 인물인 라 모타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영화의 제작자가 로버트 챠토프와 어윈 윙클러로 같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분노의 주먹'이 라 모타의 몰락을 다룬 영화인 만큼 영화의 이야기에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라 모타의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은 영화의 이야기 전개에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라 모타가 비키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리는 라 모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은 장면들은 교차 편집으로 함께 보여주는 라 모타가 승승장구하는 권투 경기 장면들과 시간적으로 비슷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은 장면들을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듯한 컬러 화면으로 처리하여 마치 영화의 초반부에서 잠깐 나왔던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전락한 라 모타가 비디오를 보면서 자신의 행복했었던 순간들을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라 모타는 밑도 끝도 없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한다. 급기야 아내와 조이와의 관계마저 의심하는 라 모타는 결국 아내와 조이에게 폭력까지 휘두른다. 이로 인해 라 모타는 조이와 사이가 멀어지고, 떠나려는 비키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복걸하여 겨우 붙잡아 두긴 하지만 비키와의 사이도 점점 멀어진다. 라 모타는 자신의 괄기와 아내에 대한 끝없는 질투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파멸로 몰아간다. 라 모타는 슈거레이 로빈슨(Sugar Ray Robinson, Johnny Barnes)과의 다섯번째 경기에서 자신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듯 방어도 하지 않고 슈거레이 로빈슨의 주먹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라 모타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고 피는 사방으로 튄다. 라 모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이라도 받으려는 듯, 링의 로프에 몸을 지탱한 채 슈거레이 로빈슨의 주먹을 끝까지 버텨낸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하자 라 모타는 슈거레이 로빈슨에게 다가가 소리친다. "레이, 난 절대로 다운 당하지 않아. 넌 날 절대로 쓰러뜨릴 수 없어. 넌 날 절대로 쓰러뜨릴 수 없다고!"
지금 라 모타에게 남아 있는 건 자존심뿐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권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포츠라, 라 모타가 어떤 선수였는지, 얼마나 유명한 선수였는지, 그리고 실제 그의 삶도 영화에서의 삶과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라 모타의 실제 모습도 폴 뉴먼 주연의 '허슬러 (The Hustler, 1961)'에서 술집의 바텐더(Jake La Motta)로 잠깐 나오는 장면을 통해 보았을 뿐이다. '분노의 주먹'에서도 슈거레이 로빈슨에게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맞으면서도 다운 당하지 않기 위해 링의 로프를 잡고 끝까지 버티는 라 모타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라 모타는 링 위에서 다운을 당하지 않았던 선수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링 위에서는 다운을 당하지 않았지만 링 밖의 인생에서는 처참하게 다운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 마이애미 교도소에서 마치 권투 경기를 하듯 주먹으로 벽을 치면서 왜라고 부르짖는 장면에서, 뉴욕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조이를 다정하게 껴안는 장면에서 그의 진심어린 자기 반성과 후회를 느낄 수 있다.
비대해진 라 모타를 연기하기 위해 영화 촬영을 한동안 중단시키면서까지 몸을 불린 로버트 드 니로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분노의 주먹'은 작품상을 포함하여 8개 부문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남우주연상과 편집상의 2개 부문의 아카데미상만 수상했다. 하지만 '분노의 주먹'은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2007년에 새로이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 (AFI's 100 Years...100 Movies)"에서 4위에 올라와 있는 영화이다.
'분노의 주먹'의 마지막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보여준, 라 모타가 나이트클럽의 스탠딩 개그맨으로 무대에 서기 직전 대사 연습을 하고 있는 장면으로 되돌아온다. 라 모타는 거울 앞에서 계속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 "그가 아니라 형이었어...난 최고가 될 수 있었어. 난 도전자가 될 수 있었어. 난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 지금은 난 건달일 뿐이야. 이게 현실이야!"
이 대사는 원래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 1954)'에서 테리(Marlon Brando)가 자신의 형인 찰리(Rod Steiger)에게 하는 대사로, 건달로 살아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함과 동시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형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는 대사이다. 라 모타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테리의 대사를 연습하고 있다. '분노의 주먹'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라 모타를 위해 인용한 성경의 한 구절로 끝을 맺는다.
이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하나님 앞에 진실을 말하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볼 수 있다는 그것이니이다."
요한복음 9장 24-26
신영역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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