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King Kong, 1933)

영화 2012. 2. 27. 14:00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 (AFI's 100 Years...100 Movies)"에 올라와 있는 영화들을 선정 기준에 따라 구별하면 크게 두 부류 - 물론 이 두 부류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은 없다 - 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주로 영화의 예술적인 측면에서 영화의 촬영 기법이나, 영화의 내용, 영화의 전개 방식과 같은 영화 형식의 발전에 기여한 영화들, 예를 들어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이나 '대부 (The Godfather, 1972)'와 같은 영화들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영화 제작 기술의 발전에 기여한 영화들로, '스타 워즈 (Star Wars, 1977)'나 '킹콩'과 같은 영화들이다. 전자에 속하는 영화들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감동을 준다. 하지만 후자에 속하는 영화들 대부분은 오늘날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와 같은 놀라운 특수효과 기술과 비교가 되어 진부하다는 느낌을 준다. 메리안 C. 쿠퍼 감독과 어니스트 B. 쇼드색 감독이 공동 연출한 '킹콩'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졸작 중의 졸작이다.

'킹콩'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영화감독인 칼 덴햄(Robert Armstrong)은 2년 전 싱가포르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섬으로 가서, 그곳에 있다는 전설의 거대한 괴물 콩을 자신의 새 영화에 출연시키고자 한다. 칼은 배가 떠나기 직전에 뉴욕의 거리에서 앤 대로우(Fay Wray)라는 매력적인 여인을 새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인도양 어딘가에 있다는 미지의 섬을 찾아 떠난다. 칼 일행은 결국 섬을 찾아내지만, 앤이 섬의 원주민들에게 납치되어 콩의 제물로 바쳐진다. 콩은 앤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앤과 사랑에 빠진 1등 항해사 잭 드리스콜(Bruce Cabot)은 앤을 콩으로부터 구해내고, 탐욕스러운 욕망에 사로잡힌 칼은 콩을 뉴욕의 무대에 세워 돈을 벌기 위해 콩을 뉴욕으로 생포해 온다.

'킹콩'의 각본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영화의 이야기는 엉성하고, 배우들의 대사는 어색하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수준 이하다. 남자 주인공인 칼과 잭을 각각 연기하는 로버트 암스트롱과 브루스 카보트는 대사를 국어책 읽듯이 딱딱하게 하고, 앤을 연기하는 페이 레이는 스피커가 찢어지도록 비명만 질러댄다 - 이 때문에 페이 레이에게 "비명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붙여졌다.

'킹콩'이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콩과 공룡들은 모형이라는 티가 금방 나고, 움직임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가장 웃기는 것은 콩의 크기가 콩이 나오는 장면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콩이 앤의 옷을 벗기며 앤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서의 콩의 크기와, 뉴욕의 무대에 묶여 있는 콩의 크기가 다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라가는 콩을 보여주는 장면에서의 콩의 크기가 또 다르다. '킹콩'의 특수효과는 '킹콩'을 리메이크한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 (King Kong, 2005)'이 보여주는 특수효과와 비교하면 더욱 초라해진다.

하지만 '킹콩'은 미국 영화 연구소가 1998년에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에서는 43위를, 2007년에 새로이 선정한 10주년 기념판에서는 41위를 차지한 영화이다. 어설픈 각본과, 배우들의 수준 이하의 연기, 조잡한 특수효과로 이루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킹콩'이 "위대한 미국 영화 100"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특수효과 때문이다. 물론 '킹콩'의 특수효과는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 보여주는 특수효과와 비교하면 아주 보잘것없지만, 이 두 영화의 특수효과를 각각 이 두 영화가 나온 당시의 다른 영화들이 보여주는 특수효과와 비교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 보여주는 특수효과는 놀랍기는 하지만,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 나온 당시의 다른 영화들, 예를 들어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과 함께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 전쟁 (War of the Worlds, 2005)'의 특수효과와 비교하면 또 그렇게 놀랍지만은 않다. 하지만 '킹콩'이 나온 당시에는 '킹콩'의 특수효과와 비슷한 수준의 특수효과를 보여주는 영화가 없었다. 기껏해야 8년 전에 나온 '잃어버린 세계 (The Lost World, 1925)'가 있긴 하지만, '잃어버린 세계'의 특수효과와 '킹콩'의 특수효과의 차이는 '킹콩'의 특수효과와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 보여주는 특수효과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킹콩'이 오늘날 영화 제작에서 의미하는 특수효과를 도입한 첫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두번째 이유는 영화의 이야기 때문이다. 물론 '킹콩'의 각본은 어설프다. 하지만 엉성한 이야기와 어색한 대사로 이루어진 지루한 영화의 초반 30분이 지나고 콩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이는 콩의 등장과 갑자기 빨라진 화면의 전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영화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인 성적 본능과 공격적인 본능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적인 콩이 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성적 본능을 자극한다. 또한 공룡이나 콩이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들은 사람들의 공격적인 본능을 자극한다. '킹콩'은 사람들의 성적 본능이나 공격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장면들을 이용하여 흥행에 성공한 '에이리언 (Alien, 1979)'과 같은 수많은 괴수 공포 영화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934년 미국 영화 제작자 및 배급업자 협회(Motion Picture Producers and Distributors of America, MPPDA)에서 제정한 영화 제작 규범(Production Code)이 시행되면서 사람들의 성적 본능과 공격적인 본능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킹콩'의 많은 장면들 - 공룡이 입으로 선원들을 으깨 죽이는 장면, 콩이 앤의 옷을 벗기고 옷의 냄새를 맡는 장면, 앤을 잃은 콩이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여 원주민들을 짓밟고 입으로 물어 뜯어 죽이는 장면, 뉴욕의 무대에서 탈출한 콩이 침대에서 자고 있는 한 여인을 창밖으로 꺼내 떨어뜨리는 장면 - 이 삭제되었다. 이 이전에는 콩이 흔들어대는 통나무에서 계곡으로 떨어진 선원들이 거대한 거미들에게 잡아먹히는 장면도 삭제되었었다. 영화 제작 규범이 철폐되고 나서 선원들이 거대한 거미들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제외한 모든 장면들이 복구되었다.

'킹콩'은 영화사에서는 크나 큰 의미가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를 공부하고 있는 관객이 아닌, 단지 즐기기 위하여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굳이 아까운 시간을 할애하면서 볼 필요가 있는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킹콩'을 보느니 영화의 상영 시간이 82분 더 길긴 하지만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을 보는 것이 시간이 덜 아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Well, Denham, the airplanes got him."

(결국, 덴햄 씨, 비행기가 그를 잡았군요.)

"Oh, no. It wasn't the airplanes. It was Beauty killed the Beast."

(오, 아닙니다. 비행기가 아닙니다. 야수를 죽인 건 미녀입니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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