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은 재능이 참 많다. 영화감독, 각본가, 배우, 작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재즈 뮤지션으로서 클라리넷 연주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우디 앨런은 지난 1월 24일에 발표한 아카데미상 후보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총 23번이나 아카데미상 후보 - 감독상 후보 7번, 각본상 후보 15번, 남우주연상 후보 1번 - 에 올랐으며, 각본상 후보 15번은 각본상 부문 역대 최고 기록이다. 우디 앨런은 총 3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는데, '애니 홀'로 감독상과 각본상, 2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한나와 그 자매들 (Hannah and Her Sisters, 1986)'로 각본상을 수상했다.

'애니 홀'은 '스타 워즈 (Star Wars, 1977)'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는데, '스타 워즈'가 거둔 흥행 성적과 미국의 영화 산업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이다. 정말 '스타 워즈'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영화였다. 그러나 '애니 홀'이 보여주는 영화 형식도 '스타 워즈' 못지않게 새롭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파격적이다. '스타 워즈'가 보여주는 새로운 영화 형식이 주로 영화 기술적인 측면에서 영화 제작 기술의 발전이라고 한다면, '애니 홀'이 보여주는 새로운 영화 형식은 영화 예술적인 측면에서 영화 형식의 파괴 또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가 영화 제작에 보편화되고, 화려한 특수효과 장면들이 판을 치는 오늘날 '스타 워즈'를 보면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애니 홀'은 여전히 참신하다.

우디 앨런이 주연, 감독, 각본을 맡은 '애니 홀'은 유쾌함 속에 사랑과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애니 홀'은 영화의 주인공인 앨비 싱어(Woody Allen)가 관객들을 향하여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니나다를까 '애니 홀'에서 앨비의 직업 또한 성공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희극 작가이다. 앨비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답게 적절한 농담을 섞어가며 1년 전만 해도 사랑하는 사이였던 애니 홀(Diane Keaton)과 헤어지고, 고독, 비참함, 고통, 불행으로 가득차 버린 자신의 삶을 불평한다. 그리고 플래시백으로 애니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애니 홀'은 앨비가 자신에 대한, 자신의 여성관에 대한, 그리고 애니와 헤어진 원인에 대한 자기 나름의 분석을 하고, 이를 통해 남녀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이다.

"La-dee-da, la-dee-da, la-la"

(라-디-다, 라-디-다, 라-라)

 

'애니 홀'은 영화 내내 영화의 기본 규칙들을 깨뜨리는 온갖 기발한 영화 형식들로 관객들을 당황케 한다. 한 공간에 현재와 과거의 상황을 함께 배치하기도 하고, 화면을 분할하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을 삽입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파격적인 형식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파격적인 형식들이 보편적인 정서와 현상을 표현하고 있어, 오히려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처음 만나 서로에 대한 탐색을 하고 있는 두 남녀 애니와 앨비가 애니의 아파트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속마음이 자막으로 드러난다. 서로에게 익숙해져 버린 애니와 앨비가 사랑을 나누는 도중,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애니의 영혼이 애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와 딴짓을 한다.

앨비는 영화 속 캐릭터라는 신분을 넘어 마치 자기가 영화감독인 양 - 물론 앨비를 연기하는 우디 앨런이 감독이긴 하지만 - 자기 마음대로 영화를 컨트롤하며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애니와 앨비의 뒤에 서 있는 한 남자(Russell Horton)가 페데리코 펠리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떠들어 대면서 애니와의 언쟁으로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앨비의 신경을 건드린다. 남자가 마셜 맥루한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자, 참다못한 앨비는 이제 남자와 언쟁을 벌인다. 앨비는 실제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을 영화 화면에 데리고 나와, 마셜 맥루한이 남자에게 당신은 내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라고 말하게 만들고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던 남자와의 언쟁을 끝낸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말한다. "정말 삶이 이렇기만 한다면."

이외에도 앨비는 갑자기 카메라를 쳐다보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기도 한다.

롤러코스터 아래에서 자란 앨비는 15년 동안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을 정도로 신경질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살 때 이미 이성에 눈을 뜬 앨비는 애니를 포함하여 여러 여자들을 만났다. 앨비는 애니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다. 첫번째 부인이었던 앨리슨(Carol Kane)은 아름답고 의지가 강하고 지적인 여자였지만, 그루초 막스가 말한, 나 같은 사람을 멤버로 받아들이는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여성관으로 인해 헤어졌고, 두번째 부인인 로빈(Janet Margolin)은 자신보다도 더 신경질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애니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친구 롭(Tony Roberts)의 소개로 롤링 스톤즈의 리포터 팸(Shelley Duvall)을 만났고, 애니가 자신을 버리고 LA로 떠난 뒤에도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앨비는 애니와 헤어지고 나서야 애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특별한 여자였는지, 그녀를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깨닫게 된다.

앨비에게 애니가 가장 특별한 여자였다는 사실은 애니와 앨비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알 수 있다. 롭의 소개로 테니스장에서 처음 만난 애니와 앨비는 그들만의 재미있는 수다를 떤다. 수다는 애니가 앨비를 자신의 아파트에 초대함으로서 애니의 아파트에까지 계속된다. 애니는 단지 바닷가재일 뿐인 바닷가재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애니는 삶을 즐길 줄 모르는, 죽어가는 뉴욕시와 같은 삶을 사는, 자신만의 섬에 갇혀 사는 앨비를 떠나려 한다. 앨비가 애니와 헤어진 것은 결국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에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을 멤버로 받아들이는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은 '애니 홀'이 반자서전적 영화라는 지적에 대해 부인했지만, 앨비와 우디 앨런은 닮은 점이 너무나 많다. 또한 우디 앨런과, 애니를 연기하는 다이안 키튼은 '애니 홀' 이전에 실제로 연인 사이였다. 그리고 다이안 키튼의 본명이 다이안 홀이며, 별명이 애니였다. 앨비처럼 우디 앨런은 다이안 키튼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으며,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의 상담도 받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앨비가 TV 쇼 시상식을 앞두고 아픈 척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우디 앨런은 시상식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디 앨런은 총 23번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은 2002년도에 열린 74회 아카데미 시상식뿐이며, 이때도 시상이나 수상을 하러 참석한 것이 아니라, 전해에 뉴욕시에서 발생한 9/11 테러 사건으로 영화인들이 뉴욕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을 꺼려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참석했다.

뉴욕시에서 태어난 우디 앨런은 뉴욕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뉴요커로 유명하다. '애니 홀'에서도 앨비를 통하여 뉴욕시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뉴욕시의 상징물 중 하나인 브루클린 다리(Brooklyn Bridge)를 배경으로 애니와 앨비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지저분한 뉴욕시도 낭만적일 수도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이안 키튼은 애니 홀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우디 앨런도 앨비 싱어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애니 홀'에는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유명 영화배우들이 많이 나오는데, 크리스토퍼 월켄이 애니 홀의 남동생 듀앤 홀(Christopher Walken) 역으로, 제프 골드블룸이 토니 레이시(Paul Simon)의 파티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손님(Jeff Goldblum)으로, 시고니 위버가 앨비의 여자 친구(Sigourney Weaver) - 시고니 위버는 대사도 없고,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 로 나온다. 그리고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화 평론가인 마셜 맥루한과, 미국의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와 같은 유명 인사가 카메오로 출연하며,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폴 사이먼이 토니 레이시 역으로 출연한다.

애니와 앨비가 키스를 하고 헤어지는 모습을 카페 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보여주는 '애니 홀'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다이안 키튼이 직접 부르는 'Seems Like Old Times'가 배경으로 흐르는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추억"을 느끼게 해준다. 삶을 즐길 줄 모르는 남자는 자신에게 특별했던 여자를 그렇게 떠나보낸다. 하지만 이 로맨티스트는 남녀 관계가 분별없는, 미친, 그리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또 다른 누군가와 계속 관계를 가지며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닭이라고 생각하는 형이 미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이 계란을 낳기를 기다려 주는 것이 또한 남녀 관계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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