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은 영화가 나온 지 7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는 영화이다. '시민 케인'은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1998년에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 (AFI's 100 Years...100 Movies)"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새로이 선정한 2007년 10주년 기념판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BFI)가 간행하는 영화 전문 월간 잡지 'Sight & Sound'에서 2012년에 발표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50 (Top 50 Greatest Films of All Time)"에서는 50년만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 (Vertigo, 1958)'에게 1위 자리를 내주기는 하였지만, '시민 케인'은 지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 영화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라는 평가를 계속 받을 영화이다.

"Rosebud!"

(로즈버드!)

 

'시민 케인'이 영화가 나온 지 7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시민 케인'의 제작, 감독, 각본, 주연을 맡은 오슨 웰스가 당시 26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당시 5대 영화 제작사 중 하나였던 RKO 라디오 픽처스(RKO Radio Pictures)는 라디오와 연극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젊은 오슨 웰스에게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만들어 보라고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오슨 웰스는 허먼 J. 맨키위츠와 함께 '시민 케인'의 각본을 썼고, 촬영은 그레그 톨랜드에게 맡겼으며, 자신이 만든 머큐리 극단(Mercury Theatre)의 동료 배우들 - 수잔 알렉산더(Dorothy Comingore)를 연기한 도로시 커밍고어만 외부에서 캐스팅하였다 - 을 캐스팅하였다.

'시민 케인'에서 오슨 웰스가 연기하는 찰스 포스터 케인(Orson Welles)은 당시 미국의 언론 재벌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를 모델로 한 캐릭터인데, 허스트는 '시민 케인'의 제작을 방해하고 상영을 막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케인이 허스트가 아님을 암시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케인이 허스트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민 케인'에 허스트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사가 나온다. 케인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10분 분량의 뉴스 영화가 끝난 직후 잡지 편집장 롤스톤 씨(Philip Van Zandt)가 말한다. "...스크린에서 우리가 본 건 위대한 미국인이야....하지만 그가 포드와 다른 점은 뭘까? 또는, 말이 났으니 말이지, 허스트와는? 존 도우와는?..."

사실 최신 영화들만을 즐기는 오늘날의 관객들이 '시민 케인'을 보면 이 영화가 왜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 케인' 이전과 당시의 유명한 영화들 몇 편만 보아도 '시민 케인'이 왜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민 케인'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에서의 영상 기술과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물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 (Pulp Fiction, 1994)'도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영화이긴 했지만, 그 당시의 다른 영화들과의 차이가 '시민 케인'만큼 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 물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이후 수많은 SF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펄프 픽션' 이후 '펄프 픽션'의 형식을 따라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 이후의 영화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오늘날의 관객들이 '시민 케인'이 왜 영화 사상 최고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는지 의아해 하는 이유도 '시민 케인'이 오늘날의 영화들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커서 오히려 그 영향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을 최신 영화들에서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슨 웰스와 '시민 케인'의 촬영을 맡은 그레그 톨랜드가 '시민 케인'에서 영화 촬영 기법 중 하나인 딥 포커스(deep focus)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딥 포커스는 카메라 가까이에 있는 물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까지 모두 초점이 맞도록 촬영하는 기법을 말하는데, 한 장면에 여러 상황을 담을 수 있어 영화의 이야기를 좀더 깊이있게 표현할 수 있다. 오슨 웰스와 그레그 톨랜드는 '시민 케인'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딥 포커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면은 케인의 어머니(Agnes Moorehead)가 8살의 어린 아들 케인(Buddy Swan)의 장래를 위해 광맥의 관리권과 아들의 양육권을 은행에 넘긴다는 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가까이에 케인의 어머니와 대처(George Coulouris)가 있고, 멀리 창문을 통해 눈 덮힌 언덕 위에서 뛰노는 8살의 어린 케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는 아들과 곧 이별을 해야 하는 케인의 어머니의 심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시민 케인'은 영상으로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좀더 깊이있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선구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케인의 어머니가 광맥의 관리권과 아들의 양육권을 넘기는 계약에 사인을 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 있다. 케인이 자신이 세운 제국의 통제권을 양도한다는 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가까이에 서류를 읽고 있는 번스타인(Everett Sloane)의 얼굴이 너무 커서 멀리 보이는 창문이 보통의 창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케인이 창문 쪽을 걸어가자 창문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게 된다. 딥 포커스의 사용으로 큰 창문 아래에 서있는 케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 장면은 케인의 모습을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게 하여 모든 것을 잃은 케인을 암시하기 위한 장면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또 있는데, 케인이 제나두의 벽난로에 서있는 장면이다. 케인이 지그소 퍼즐을 맞추고 있는 수잔을 뒤로 하고 벽난로 쪽으로 걸어갈 때 벽난로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보게 된다.

'시민 케인'에는 딥 포커스를 사용하여 촬영한 장면 말고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장면들이 너무나도 많다. 음침한 제나두를 보여주는 장면, 케인과 에밀리 노튼(Ruth Warrick)의 사이가 세월과 함께 점점 소원해짐을 보여주는 몽타주 장면, 수잔의 집 현관문이 신문의 사진으로 디졸브되는 장면, 수잔이 선 오페라 무대에서 무대 위에 있는 두 명의 무대 담당자를 향해 카메라가 수직으로 올라가는 장면,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케인이 수잔이 떠난 직후 두 개의 큰 거울 사이를 걸어가는 장면 등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시민 케인'의 이야기는 늙은 케인이 플로리다의 대저택 제나두에서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케인은 죽기 직전에 영화 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대사를 남긴다. "로즈버드!"

롤스톤 씨는 케인의 죽음 내면의 것을 취재하고자 기자인 톰슨(William Alland)에게 케인이 죽기 직전에 말한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조사하라고 한다. '시민 케인'은 영상 기술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 구조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시민 케인'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일반적인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거부한다. '시민 케인'의 이야기는 톰슨이 케인의 주변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이들이 케인을 회상하면서 이들의 관점에서 들려주는 케인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케인의 죽음을 알리면서 케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뉴스 영화는 관객들에게 케인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이어 주고 이해시켜 주는 지침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로즈버드"가 적힌 썰매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시민 케인'은 관객들에게 로즈버드가 정확히 무엇인지 밝혀 주지는 않는다. 관객들은 "로즈버드"가 적힌 썰매가 케인이 어린 시절에 타던 썰매라는 것을 기억한다. 관객들은 "로즈버드"가 적힌 썰매를 통해 로즈버드는 모든 것을 잃은 케인이 그리워 한 어린 시절 또는 어린 시절의 안정감이나 순수함일 것이라고 그저 짐작할 뿐이다. 로즈버드가 정확히 무엇인지 밝혀 주는 것보다 오히려 관객들에게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마지막에 톰슨이 말한다. "...케인 씨는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모든 걸 잃었지. 로즈버드는 어쩌면 그가 가질 수 없었던 것 또는 잃어버린 것인지도 몰라. 어쨌든 그건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어. 어떤 말도 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로즈버드는 마치 지그소 퍼즐의 한 조각 같은 것인지도 몰라, 잃어버린 한 조각!"

거의 모든 고전이 그렇듯 '시민 케인'도 개봉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 '시민 케인'의 흥행 실패에는 허스트의 책임도 크다. '시민 케인'은 작품상을 포함한 9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아카데미 각본상만 수상했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 각본상이 오슨 웰스가 평생 동안 수상한 유일한 아카데미상이다. 오슨 웰스는 1970년에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원래 천재와, 천재가 남긴 고전의 가치는 훗날에 드러나는 법이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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