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Mahershala Ali)이 달이 떴을 때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에 어느 할머니가 했던 말을 리틀(Alex Hibbert)에게 들려준다. "저 달빛을 따라잡으려고 뛰어다니네. 흑인 아이들은 달빛을 받으면 파랗게(blue) 보여. 너도 파랗게 보여. 난 널 블루라고 부르겠어."
'문라이트'도 흑인 아이 리틀이 해변가에서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듯 파랗게 보이는 리틀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blue"는 "파란"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울적한", "우울한", "그다지 희망적이 아닌"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문라이트'는 한 흑인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영화이다. 영화의 이야기만 언뜻 들으면 '문라이트'는 2년 전에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한 아이의 성장 드라마 '보이후드 (Boyhood, 2014)'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성장 드라마라고 하면 주인공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삶에 희망을 보게 되는 이야기가 보통이지만, '문라이트'를 성장 드라마라고 하기에는 '문라이트'의 주인공의 삶이 너무나도 우울하고 어둡다. 주인공의 삶에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어른으로 성장한 주인공이, 마약에 빠져 엄마 노릇을 하지 못했던 엄마 폴라(Naomie Harris)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또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친구를 10년 만에 만나면서, 희미한 달빛처럼 작은 희망이 주인공을 비추는 듯하지만, '문라이트'는 파랗게 보이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문라이트'는 세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장에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문라이트'의 주인공의 이름은 샤이론이다. 리틀과 블랙은 샤이론의 별명이다. 1장 "리틀"은 또래에 비해 몸집이 왜소한 리틀이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피해 도망쳐 들어간 마약 밀매 장소인 빈 건물에서 마약상 후안을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후안과 그의 여자 친구 테레사(Janelle Monae)는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마약을 하는 엄마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는, 갈데없는 외로운 아이 리틀을 마치 아들처럼 돌봐 준다.
2장 "샤이론"은 십 대 청소년이 된 샤이론(Ashton Sanders)이 교실에서 수업 중에 학급 친구 테렐(Patrick Decile)로부터 놀림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샤이론은 친구들에게는 따돌림을 당하고, 이제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린 엄마로부터는 완전히 소외된, 여전히 갈데없는 외로운 십 대 청소년이다. 이제는 후안도 없다. 정처 없이 도시를 떠돌던 샤이론은 해변가에서 유일한 친구 케빈(Jharrel Jerome)을 우연히 만난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테렐의 이간질로 샤이론과 케빈의 사이는 갈라지고, 더이상 테렐의 괴롭힘을 참지 못한 샤이론은 교실에서 의자로 테렐을 내리친다. 이로 인해 샤이론은 경찰에 끌려가게 된다.
3장 "블랙"에서는 1장과 2장에 비해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어른으로 성장한 블랙(Trevante Rhodes)이 재활원에서 마약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엄마를 면회하러 가고, 10년 만에 케빈(Andre Holland)의 전화를 받고서 케빈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가 전부다. 하지만 3장은 마지막 장인 만큼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가장 감동적인 장이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음악이다. 3장에서는 음악, 특히 '문라이트'가 흑인 영화감독이 만든 흑인 영화인 만큼 흑인 음악 또는 흑인 음악 풍의 음악을 사용하여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해 준다. 엄마를 면회하러 간 블랙은 엄마가 엄마 노릇을 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다. 블랙이 엄마를 면회하고 난 직후에 브라질 가수 Caetano Veloso가 부르는 'Cucurrucucu Paloma'가 흐르면서 블랙의 찢어지는 마음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말하네. 그는 밤마다 오직 울기만 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그는 먹지도 않고 그저 잔만 들이켰다고. 사람들은 단언하네. 하늘도 그의 울음을 듣고 흔들렸다고. ..."
블랙의 우울한 삶에서 그래도 블랙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나마 행복했던 순간이 둘 있다. 하나는 리틀이던 시절에 후안에게서 수영을 배웠던 순간이다. 리틀은 후안이 시키는대로 후안을 믿고 바다에 몸을 눕힌다. 블랙에게 후안은 처음으로 자신이 믿었던 사람이다. 결국 블랙은 후안처럼 마약상이 되었다. 후안처럼 금니까지 달고 다닌다. 3장에서 블랙이 마약상이라는 사실을 힙합 그룹 Goodie Mob의 강렬한 랩뮤직 'Cell Therapy'를 통해 관객들에게 알려준다. "... 나와 내 가족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왔어. 일련번호가 있는 출입문에 마약이 없는 지역이라는 문구가 있어. 하지만 내겐 그렇게 보이지 않아. 왜냐하면 1년 내내 판매처에 모여 있는 청년들을 볼 수 있거든. ..."
블랙에게 잊을 수 없는 행복했던 나머지 한 순간은 십 대 청소년 시절에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케빈과 사랑을 나눴던 순간이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3장에서 10년 만에 케빈을 만난 블랙은 케빈에게 왜 전화를 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케빈은 대답 대신에 주크박스로 가서 Babara Lewis의 'Hello Stranger'를 튼다. "안녕, 이방인. 돌아온 당신을 보니 너무 좋네요. 얼마나 오래됐나요? ... 정말 오래된 것 같군요. 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무 기뻐요. 당신은 나에게 안부 인사를 하기 위해 잠시 들렀었죠. 당신이 종종 그랬던 기억이 나요. ..."
블랙은 10년 동안 숨겨 온 케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케빈에게 고백한다. "날 만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너뿐이었어. 그때 이후로 난 누구와도 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어."
샤이론이 마약상인 후안에게 마치 아빠에게 의지하듯 의지하고, 결국에는 후안처럼 마약상이 되는 이야기와, 특히 샤이론이 이성 친구도 아닌 동성 친구인 케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가 불편한 관객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문라이트'를 보면 '문라이트'가 전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샤이론의 우울한 삶을 이해하고 샤이론의 입장에서 '문라이트'를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빠도 없는 샤이론에게 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마약에 빠져 샤이론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샤이론은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이론을 돌봐 준 사람은 후안뿐이었다. 그리고 케빈은 외로운 샤이론에게 유일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샤이론이 정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샤이론은 10년 동안 케빈을 잊지 못하고 살았다. 샤이론의 우울한 삶을 이해하고 샤이론의 입장에서 '문라이트'를 보면, 관객들은 '문라이트'의 마지막에 샤이론이 케빈에게 기대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케빈과 다시 함께 하게 된 샤이론이 느끼고 있을 감동보다도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의 성장 드라마라기보다는, 관객들을 위한, 관객들의 성장 드라마이다.
얼마 전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문라이트'는 예상을 깨고 아카데미 작품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작이었던 '라라랜드 (La La Land, 2016)'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제치고"는 "우열 또는 선후를 가리는 상황에서 앞지르다" 또는 "거치적거리지 않게 한옆으로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 "제치고"는 후자의 의미이다. 아카데미 작품상 시상자로 나선 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의 봉투를 잘못 전달하는 바람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으로 '라라랜드'가 호명되었다가 '라라랜드'의 제작진들이 수상 소감을 하는 도중에 '문라이트'로 정정되는,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악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문라이트'는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 위에서 '라라랜드'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문라이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하여, 배리 젠킨스 감독이 아카데미 각색상을, 폴라 역의 나오미 해리스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여, 모두 3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문라이트'에서 리틀, 샤이론, 블랙을 각각 연기한 알렉스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레반트 로즈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보이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Ellar Coltrane)이 영화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사실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12년에 걸쳐 같은 배우로 촬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알렉스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레반트 로즈의 연기 덕분에 '보이후드'처럼 장기간에 걸쳐 촬영을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알렉스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레반트 로즈가 각각 연기한 리틀, 샤이론, 블랙의 얼굴은 서로 다르지만, 똑같은 표정, 똑같은 우울한 눈빛으로 인해, 리틀, 샤이론, 블랙의 얼굴들을 편집하여 마치 한 사람의 얼굴로 합친 '문라이트'의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 - 난 '문라이트'를 보기 직전까지 영화 포스터의 이미지가 한 사람의 얼굴인 줄 알았다 - 처럼, 마치 한 배우가 리틀, 샤이론, 블랙을 연기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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