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의 아홉 번째 영화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깊은 산속 신비로운 연못 위에 단아하게 떠 있는 암자에 노스님(오영수)과 함께 살고 있는 동자승(김종호)의,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에 이르는 인생 여정을 자연의 사계에 비유해 그려 나가고, 그것을 통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건네는 불교 영화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봄"의 동자승 이야기와, "여름"의 소년승(서재경) 이야기, "가을"의 청년승(김영민) 이야기, "겨울"의 장년승(김기덕)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고...봄"의 동자승 이야기의 다섯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봄". 산속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에게 돌멩이를 매달고 재미있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동자승의 모습을 지켜보던 노스님은 그날 밤 잠든 동자승의 등에 돌을 묶어 둔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동자승이 울먹이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노스님은 잘못을 되돌려 놓지 못하면 평생의 업이 될 것이라 이른다.
"여름". 동자승이 자라 17세 소년승이 되었을 때, 동갑내기 소녀(하여진)가 요양하러 암자에 들어온다. 소년승의 마음에 소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차오르고, 노스님도 그들의 사랑을 감지한다. 쾌유한 소녀가 떠난 후 더욱 깊어 가는 사랑의 집착을 떨치지 못한 소년승은 암자를 떠난다.
"가을". 암자를 떠난 후 십여 년 만에, 배신한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 되어 암자로 도피해 들어온 청년승은 단풍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암자 안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자, 노스님은 그를 모질게 매질한다. 노스님은 나무 바닥에 마음을 다스리는 반야심경을 쓰고 청년승에게 칼로 글자들을 한 자씩 파면서 분노를 마음에서 지우도록 한다. 노스님은 청년승을 체포하기 위해 암자를 찾은 지형사(지대한)와 최형사(최민)에게 청년승이 반야심경을 다 판 다음에 데리고 갈 것을 부탁한다. 청년승을 떠나보낸 노스님은 홀로 남은 고요한 암자에서 스스로 다비식을 치른다.
"겨울". 장년의 나이로 폐허가 된 암자로 돌아온 장년승은 노스님의 사리를 수습해 자신이 조각한 얼음 불상에 모신다. 장년승이 선무도에 정진하며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암자를 찾아온 이름 모를 아기엄마(박지아)가 아기(송민영)를 암자에 남겨 두고 떠난다. "그리고...봄". 장년승은 어느새 자라난 동자승과 함께 암자의 평화로운 봄날을 보내고 있다. 동자승은 산속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입속에 돌멩이를 집어넣고 재미있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는 괴로움을 소멸시켜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네 가지 진리로,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고제는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태어나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근심하고 슬퍼하고 걱정하는 괴로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 즉 몸(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을 5온(蘊)이라 하는데, 이 5온에 집착이 번성하므로 괴로움이고, 5온은 집착을 일으키는 근원이므로 괴로움이며, 또 5온에 집착하므로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집제는 괴로움의 발생이라는 진리로,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혀 준다. 집(集)이란 "발생"이라는 뜻이다. 괴로움은 어떤 원인과 조건이 성숙하고 결합해서 일어나는데, 그 원인은 갈애(渴愛), 즉 목이 말라 애타게 물을 찾듯이 몹시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애욕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갈애가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리고 한 발짝 물러서서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게 수행의 시작이다. 갈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반복해 나가면 갈애는 점점 약화되어 간다. 따라서 갈애가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집제의 요점이다.
멸제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이다. 5온의 작용에서 집착이 소멸되고, 또 그 5온에 집착하지 않아 갈애가 소멸된 상태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소멸된 열반의 경지이다. 그리고 도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로,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여덟 가지 바른 길, 즉 바르게 알기(정견(正見)), 바르게 사유하기(정사유(正思惟)), 바르게 말하기(정어(正語)), 바르게 행하기(정업(正業)), 바르게 생활하기(정명(正命)), 바르게 노력하기(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알아차리기(정념(正念)), 바르게 집중하기(정정(正定))의 8정도(正道)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 -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 의 하나인 제행무상은 모든 현상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생멸을 끝없이 반복한다는 가르침이다.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제행무상과 윤회를 생각나게 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치 관객들을 초대하듯 두 명의 사천왕이 그려진 일주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주문이 열리면 연못 위에 떠 있는 암자의 계절에 따른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일주문에서 나무배를 타고 노를 저어 암자에 갈 수 있다. 담이 없이 일주문만 세워져 있어 일주문의 양옆은 개방되어 있다. 암자 안에도 불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공간과 잠을 자는 공간이 벽이 없는 두 개의 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아침에 목탁 두드리기를 멈추고 기도를 마친 노스님은 자고 있는 동자승을 깨울 때 소리를 지르거나 개방되어 있는 문 옆을 통하지 않고 굳이 문을 열고 문을 통하여 동자승에게 그만 일어나라고 외친다. 잠에서 깬 동자승도 문을 통하여 기도하는 공간으로 이동하고 불상 앞에 앉아 기도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연못과 연못 위에 떠 있는 암자는 사람의 마음을 상징한다. 노스님과 동자승이 굳이 문을 통하여 기도하는 공간과 잠자는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것은 사성제의 도제에서 말하는 정도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소녀에 대한 애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소년승은 밤에 자고 있는 노스님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 옆을 통하여 소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어느 날 아침 노스님은 배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나른하게 잠들어 있는 소년승과 소녀를 발견한다.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 소년승에게 노스님이 말한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라. ...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품게 한다."
노스님은 사성제의 집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암자 앞 나무 바닥에 노스님이 마음을 다스리는 반야심경을 쓰고, 청년승이 그것을 파는 것도 마음속에 그것을 새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암자에 비단잉어, 개, 수탉, 고양이, 거북이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성제의 집제에서 말하는, 열반에 이르는데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인 3독(毒) -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 - 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윤회는 인간이 죽어도 그 업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불교 교리이다. 여섯 가지 세상은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도(地獄道), 굶주림의 고통이 심한 아귀도(餓鬼道), 네 발 달린 짐승과 새, 고기, 벌레, 뱀들이 사는 축생도(畜生道), 노여움이 가득한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이 사는 인도(人道),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천도(天道)이다. 인간은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죽은 뒤에 다시 여섯 세계 중 한 곳에 태어나 내세를 누리며, 그 내세에 사는 동안 저지른 업에 따라 내내세에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한다. 이러한 윤회는 윤리 도덕적인 측면, 즉 권선징악적인 차원에서 특히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권선징악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이 윤회설이 강조되었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의 왕생 등을 보다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대한 관심보다, 현실의 삶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깊이 다스려서 언제나 고요한 열반의 세계나 불국토(佛國土)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점검하도록 하는 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마음이 번뇌로 가득차 있는 것이 곧 지옥이고,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귀이며, 어리석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축생이라고 보는 등, 이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한다고 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도 연못 위에 떠 있는 암자, 즉 사람의 마음에 육도가 있으며, 암자의 동물들은 육도 중 하나인 축생, 즉 어리석은 마음을 의미한다. 단, 노스님의 다비식 이후에 등장하는 뱀은, 최초의 불교 경전인 '숫파티타파'에 세속의 번거로움을 떠나는 수행자의 모습이 마치 뱀이 묵은 껍질을 벗어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열반에 이른 노스님을 의미한다.
아직 눈에서 분노와 섬뜩한 살기가 느껴지는 청년승이 자신은 사랑을 한 죄밖에 없는데 그 여자는 다른 사람을 만났고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자, 노스님이 말한다.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 가진 것을 놓아야 할 때가 있느니라. 내가 좋은 걸 남도 좋은 지 왜 몰라?"
노스님은 사성제의 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노스님은 연못과 연못 위에 떠 있는 암자, 즉 자신의 마음을 깊이 다스린다.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에게 매단 돌멩이를 풀어 주기 위해, 노스님이 묶어 둔 돌을 등에 짊어진 채 배를 타고 산속으로 들어간 동자승이 죽은 물고기를 땅에 묻고, 개구리에 매달려 있는 돌멩이를 풀어 주고, 죽은 뱀을 보고 우는 모습을 어느새 동자승을 따라온 노스님이 지켜보고 있다. 배를 타고 산속 계곡으로 들어간 청년승이 계곡물에 뛰어들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어느새 청년승을 따라온 노스님이 지켜보고 있다. 노스님은 암자에 배도 없는데 어떻게 동자승과 청년승을 따라온 것일까? 청년승과 지형사와 함께 배에 오른 최형사가 힘껏 노를 젓는데도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 노스님이 청년승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야 배가 움직인다. 청년승을 보내고 싶지 않은 노스님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청년승과 두 형사가 일주문을 나서자 일주문이 저절로 닫히고, 배가 저절로 암자로 되돌아온다.
목도리로 얼굴을 가린 아기엄마는 암자 안 불상 앞에서, 사성제의 고제에서 말하는 현세에서의 삶은 곧 고통과 같다는 진리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몹시 흐느껴 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아기를 암자에 남겨 두고 암자를 떠나려던 아기엄마는 꽁꽁 언 연못을 걸어가다, 장년승이 꽁꽁 언 연못에 뚫어 놓은 구멍에 빠지고 만다. 아침에 죽은 아기엄마를 연못에서 건져 올린 장년승은 아기엄마가 빠진 구멍에 목도리를 깔고 그 위에 불상을 얹어 놓는다. 이는 널리 인간 전체를 구제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교의 한 교파인 대승 불교의 사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기엄마의 얼굴을 끝까지 보여 주지 않는 이유도 그 구제의 대상이 특정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동자승에게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에게 매단 돌멩이를 풀어 주고 오면 등에 묶어 둔 돌을 풀어 주겠다고 말한 노스님이 계속해서 말한다.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 중 어느 하나라도 죽어 있으면은 너는 평생동안 그 돌을 마음에 지니고 살 것이다."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에게 돌멩이를 매달고 결국 물고기와 뱀을 죽인 업과 아내를 죽인 업을 짊어진 장년승은 절구를 매달고 반가 사유상을 손에 들고 고행의 길에 나선다. 이때 국악인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산의 정상에 오른 장년승은 저 멀리 연못과 연못 위에 떠 있는 암자, 즉 자신의 마음을 바라본다.
"그리고...봄"의 동자승이 과거의 동자승처럼 산속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입속에 돌멩이를 집어넣고 재미있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이야기는 반복되는 인생을 암시한다. 저 멀리 연못과 연못 위에 떠 있는 암자를 바라보는 반가 사유상이 저 동자승 중생은 또 어떻게 구제해야 하나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프로덕션 준비 단계부터 독일의 아트 하우스 판도라 필름(Pandora Film)이 공동 제작사로, 유럽 영화 시장의 허브 바바리아 필름(Bavaria Film)이 배급사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국내 최초로 이루어진 이같은 해외와의 사전 제휴는 세계적 시네아스트로 인정받는 김기덕 감독의 국제적 명성과 작품에 대한 신뢰 덕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제56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청년 비평가상을 수상하여 다시 한번 김기덕 감독 작품에 대한 국제적 지지와 관심을 확인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제4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제24회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과 기술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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