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는 '아비정전 (阿飛正傳, 1990)', '중경삼림 (重慶森林, 1994)', '동사서독 (東邪西毒, 1994)', '타락천사 (墮落天使, 1995)',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 1997)' 등을 연출한 홍콩의 영화감독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다. 자신의 영화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왕가위 감독은 '화양연화'의 시나리오도 자신이 직접 썼다.

내가 지금까지 본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뿐이다. 두 작품만으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르기는 하지만,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를 보면,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영상 스타일로 관객들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동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왕가위 감독은 스타일에 집중하기로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그는 스타일이 영화의 장식이 아니라 내용이라 본다.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는 같은 로맨스물이기는 하지만, '중경삼림'이 새로운 사랑을 찾는 젊은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유쾌하고 청순 발랄한 영화라면, '화양연화'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진중하게 그린 영화이다. 인생의 꽃 같은 시절,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 제목에서부터 이루지 못한 옛사랑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화양연화'는 영화의 이야기도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작된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다. 여자는 돌아서서 가 버린다."

1962년 홍콩. 수리쩐(張曼玉(장만옥))과 그녀의 남편 첸 씨(張耀揚(장요양)(목소리))가 쑨 부인(潘迪華(반적화))의 셋집 아파트에, 그리고 이웃인 구 씨(陳萬雷(진만뇌))의 셋집 아파트에 차우 모윈(梁朝偉(양조위))과 그의 아내 차우 부인(孫佳君(손가군)(목소리))이 같은 날에 이사를 온다. 이사 온 첫날부터 아파트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던 첸 부인과 차우는 어느 순간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의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의 불륜 관계를 눈치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상황에 휘말리면서 첸 부인과 차우는 이웃들의 눈을 피해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 간다.

'화양연화'는 불륜극이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불륜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여느 불륜극과 마찬가지로, '화양연화' 역시 첸 부인과 차우의 불륜을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하지만 '화양연화'에서의 첸 부인과 차우의 사랑은 그 어떤 불륜극에서의 사랑보다도 애틋하면서도 미스터리하다.

첸 부인과 차우는 각자의 배우자들이 저지른 불륜의 희생자들이다. 첸 부인과 차우는 각자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자신들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불륜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첸 부인과 차우는 서로 상대방의 배우자를 연기하며 자신들이 상상한 대로 그들의 불륜을 재현해 보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기와 실제 상황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화양연화'는 이러한 첸 부인과 차우의 감정에 집중하기 위해, 그들의 배우자들인 첸 씨와 차우 부인은 뒷모습만 잠깐 보여 주고 목소리만 들려줄 뿐, 얼굴은 보여 주지 않는다.

'화양연화'의 이야기 배경인 1960년대 홍콩에서 - 영화에서도 첸 부인의 직장 상사인 호 씨(雷震(뇌진))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차우의 직장 동료인 아핑(蕭炳林(소병림))은 홍등가를 드나드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 불륜이 아주 없던 일은 아니었지만, 홍콩 사람들은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불륜은 상당히 큰 금기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첸 부인과 차우는 서로 만남을 이어 가면서도 이웃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각자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해서 자신들도 쉽게 그 같은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다. 차우가 무협 소설을 쓰기 위해 - 그리고 아마도 첸 부인과 함께하기 위해 - 빌린 호텔방 2046호 -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다음 작품이 '2046 (2046, 2004)'이다. - 를 찾은 첸 부인에게 "당신이 올 줄 몰랐어요."라고 말하자, 첸 부인이 차우에게 말한다. "우린 그들처럼 되지 않을 거니까요."

하지만 첸 부인과 차우는 사랑에 빠져들고, 첸 부인과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차우는 결국 홍콩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차우가 첸 부인에게 말한다. "우린 그들처럼은 안 될 거라 생각했죠. 근데 아니었어요. ... 그 두 사람의 시작이 궁금했었는데, 이제 알겠어요.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

차우와 첸 부인은 이별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이별의 리허설을 한다.

'화양연화'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영화이다. '화양연화'는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해야 하는 영화이기보다는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 주연 배우들의 연기 등이 연출하는 영화의 정서적인 분위기를 통해 느껴야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화양연화'는 제53회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기술상을 수상했는데,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등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도맡아 촬영한 호주의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감각적인 촬영과, '화양연화'의 미술과 의상, 그리고 편집까지 담당한 장숙평의 감각적인 영화의 비주얼 디자인, 그리고 첸 부인과 차우를 각각 연기하는 장만옥과 양조위의 고도로 절제된 연기를 통해, 자신들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다 결국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회한과 추억으로만 남기고 마는 첸 부인과 차우의 애틋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 내고 있다.

'화양연화'는 관객들이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첸 부인과 차우의 좁은 셋집 아파트를 배경으로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장면들과, 관객들이 마치 숨어서 첸 부인과 차우의 만남을 엿보는 듯 느껴지는, 숨겨진 카메라로 몰래 촬영한 듯한 장면들을 통해,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웃들의 눈을 피해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 가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억압된 첸 부인과 차우에 관객들이 자신을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호텔방에서 첸 부인은 차우가 무협 소설 쓰는 것을 돕는다. '화양연화'에서 첸 부인과 차우가 호텔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나,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는 첸 부인이 차우에게 자신들은 그들의 배우자들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듯 육체적으로 - 적어도 영화의 이야기 상으로는 - 순결하다. 하지만 영화는 첸 부인을 바라보는 차우의 강렬한 눈빛과, 첸 부인이 "국수 사러 가면서도 차려입는", 몸에 착 달라붙은 화려한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 전위적으로 꾸민 붉은색의 호텔 복도 등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화양연화'는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 간행하는 영화 전문 월간 잡지 'Sight & Sound'가 2022년에 발표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The Greatest Films of All Time)"에서 5위에 랭크되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비전문가인 내가 '화양연화'의 작품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과연 '화양연화'가 이 정도로 높은 순위에 랭크될 만한 영화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싱가폴로 떠나기로 한 차우가 독백한다. "나예요. 배표 한 장 더 있으면 나와 같이 갈래요?"

첸 부인 역시 싱가폴로 떠난 차우의 호텔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독백한다. "나예요. 배표 한 장 더 있으면 날 데려갈래요?"

1963년 싱가폴. 첸 부인을 그리워하는 차우가 아핑에게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 ...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낸 다음 거기다 비밀을 털어놓고 진흙으로 막았대. 그럼 비밀이 그 나무에 갇혀서 아무도 모르는 거야."

첸 부인은 싱가폴의 차우의 아파트를 찾지만, 차우는 직장으로 일하러 나가고 아파트에 없다. 직장에서 일을 하던 차우는 자신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지만 - "아마도" 첸 부인인 것 같은 -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다. 이때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가수인 냇 킹 콜이 부르는 'Quizas, Quizas, Quizas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결국 첸 부인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전화를 끊어 버린다.

1966년 홍콩. 첸 부인과 차우는 자신들이 "화양연화"에 살았던 아파트를 방문한다. 첸 부인은 차우가 살았던 아파트를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차우는 냇 킹 콜이 부르는 'Quizas, Quizas, Quizas'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첸 부인이 살았던 - 그리고 "아마도" 쑨 부인이 딸이 있는 미국으로 이사를 간 후에 첸 부인이 다시 이사를 와서 지금은 - "아마도" 첸 씨가 아닌 차우의 아이일 수도 있는 -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 아파트의 문을 한참 바라본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그때의 모든 것이 전부 사라졌다."

1966년 캄보디아. 차우는 캄보디아의 유명한 사원 앙코르 와트에서 외벽의 움푹 패인 구멍에 입을 대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다음 구멍을 흙으로 메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는 지난 시절을 그리워한다. 먼지 쌓인 유리창을 통하여 보듯이 과거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가 보는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나면 항상 귀에 맴도는 음악들이 있는데, '화양연화'의 경우, '유메지의 테마 (Yumeji's Theme)'와, 냇 킹 콜이 부르는 'Aquellos Ojos Verdes (초록빛 눈)'와 'Te Quiero Dijiste (당신을 사랑합니다)'와 'Quizas, Quizas, Quizas'가 그렇다. '유메지의 테마'는 원래 일본 영화인 '유메지 (夢二, 1991)'의 사운드 트랙으로, '유메지'의 음악을 담당한 우메바야시 시게루가 작곡했다. 하지만 지금은 '화양연화'의 사운드 트랙으로 더 유명하다.

'화양연화'의 마지막에서 1966년에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뉴스 장면이 나온다. 왕가위 감독은 1994년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중경삼림'에서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둔 홍콩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영화의 이야기에 담았었는데, 1960년대의 홍콩을 배경으로 한 '화양연화'에서도 딸이 있는 미국으로 이사를 가는 쑨 부인이 첸 부인에게 "우리 딸이 홍콩의 미래가 걱정스럽대."라고 말하는 장면과, 필리핀으로 이사를 간 구 씨의 셋집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남자(張同祖(장동조))가 차우에게 "홍콩이 혼란스러우니 다들 떠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홍콩 반환 이후에 제작된 '화양연화'에서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서 영화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건, 첸 부인과 차우의 사랑도 앙코르 와트의 외벽에 조각된 모든 부조 장식들에 깃들어 있는 수세기에 걸쳐 반복된 각종 인간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홍콩의 식민지 시절에 보내는 작별 인사이기도 하다.

Posted by unforget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