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정통 서부 영화와는 달리, 반영웅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이며, 현실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수정주의 서부 영화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수정주의 서부 영화들로는 샘 페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 아서 펜 감독의 '작은 거인 (Little Big Man, 1970)' 등이 있다.

어딘가에서 '와일드 번치'는 에릭 시갈(Erich Segal)식 수정주의 서부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대한 헤밍웨이식 응답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만큼 '와일드 번치'와 '내일을 향해 쏴라'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나 영화의 주제 등 많은 부분이 흡사하면서도 영화의 스타일은 서로 많이 다른 영화들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가 재치와 정감이 넘치고, 우회적이면서 조금은 영화적인데 반해 '와일드 번치'는 냉철하고 대담하며, 직설적이고 좀더 사실적이다.

텍사스주의 한 마을에 미국 군인들로 보이는 한 무리가 나타난다. 이들은 철도 회사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강도들로 돌변해 금고를 털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들을 잡기 위해 철도 회사에서 고용한 무리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철도 회사에서 고용한 무리와 처참한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 샘 페킨파 감독은 이 장면들을 통해 그 당시 명분 없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미국 군인들로 변장한 반영웅주의 이미지의 무리는 미국을, 마을은 베트남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We've got to start thinking beyond our guns. Those days are closing fast."

(이젠 총보다 머리를 써야 해. 시대가 급변하고 있어.)

 

'와일드 번치'도 '내일을 향해 쏴라'와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범법자들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 철도 회사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파이크(William Holden)가 이끄는 일당을 잡기 위해서 무고한 마을 사람들의 희생도 서슴지 않는 타락한 철도 회사 간부 해리건(Albert Dekker)은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과 희생도 정당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상징하고 있다. 파이크 일당은 해리건의 협박으로 할 수 없이 고용된 파이크의 옛동료 손튼(Robert Ryan)이 이끄는 추적대를 피해 멕시코로 가지만, 앤젤(Jaime Sanchez)의 마을에서, 또다른 사회의 부조리를 상징하고 있는 타락한 멕시코 연방군 장군 마파치(Emilio Fernandez)의 착취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자신들 또한 마파치에게 조종 당하는 신세가 된다. 파이크와 더치(Ernest Borgnine), 그리고 고치 형제(Warren Oates, Ben Johnson)가 마파치에게 잡혀 있는 앤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결과가 뻔한, 너무나도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와일드 번치'의 마지막 장면은 그들이 그동안 참고 참았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마지막 반항인 셈이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와 영화의 주제에 있어서 '와일드 번치'와 '내일을 향해 쏴라'는 서로 굉장히 비슷한 영화들이다. 하지만 '와일드 번치'는 '내일을 향해 쏴라'와 한가지 큰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폭력과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와일드 번치'는 전갈을 개미떼에 던져넣고, 급기야 불로 태워 죽이면서 웃고 즐기는 아이들을 시작으로, 총격전이 끝난 마을에서 시체들을 향하여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서 노는 아이들, 마파치 군과 비야(Villa) 군의 전투에서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하게 서있는 마파치를 우러러보는 소년, 파이크 일당과 마파치 군의 총격전에서 파이크를 등 뒤에서 쏴 죽이는 소년을 통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대전제와 함께, 슬로 모션(slow-motion)이나 여러 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다각도로 찍는 촬영 기법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을 통하여 보여주는, "폭력의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감독다운 샘 페킨파 감독의 처절하고 비참한 폭력에 대한 묘사는, 이러한 폭력 장면들을 본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샘 페킨파 감독은 이러한 원래 의도와는 달리 영화를 본 관객들이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을 즐기는 부작용도 목격하게 된다. 그만큼 샘 페킨파 감독의 폭력에 대한 묘사에는 비참함과 동시에 비장함도 함께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폭력에 대한 묘사와 이러한 묘사가 관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들이다.

샘 페킨파 감독은 '와일드 번치'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범법자들인 파이크 일당보다도 더 폭력적인 이미지로 굉장히 혐오스럽게 묘사해 놓았는데, 이러한 파이크 일당의 상대적으로 덜 폭력적인 이미지와 함께, 이제는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파이크의 인물 설정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범법자들인 파이크 일당에게 오히려 동정심을 가지게 하여, 사회의 부조리에 무모한 방법으로 항거한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게끔 하고 있다 - 위급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부치 캐시디(Paul Newman)와 선댄스 키드(Robert Redford)의 친근한 캐릭터를 이용해 관객들로부터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내일을 향해 쏴라'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화의 중반부에 나오는, 말에서 떨어진 파이크가 힘겹게 다시 말에 올라 말을 타고 가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 말을 타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이는 파이크의 뒷모습은 영화가 끝나도 서글픈 마음과 함께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는 장면이다.

Posted by unforget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