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 대로'는 영화의 이야기와 영화의 형식,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모든 면에서 소름 끼치는 영화이다. '선셋 대로'는 왕년에는 대스타였으나, 이제는 늙고 한물간 한 여배우의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무서운 집착과 광기, 그리고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할리우드의 이면을 소름 끼치도록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영화이다.

'선셋 대로'는 시작부터 소름 끼친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길로 유명한 선셋 대로에 위치한 어느 대저택의 수영장에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선셋 대로'의 이야기는 죽은 이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며, 시간을 6개월 전으로 되돌려 자신이 시체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산 직전인 별 볼일 없는 시나리오 작가 조 길리스(William Holden)는 압류된 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다 우연히 6개월 후에 자신이 죽게 될 대저택으로 숨어들게 된다. 조 길리스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에 나오는 늙은 해비쉠과도 같은 이 대저택이 무성 영화 시절의 대스타 노마 데스먼드(Gloria Swanson)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You're Norma Desmond. You used to be in silent pictures. You used to be big."

(당신은 노마 데스먼드군요. 무성 영화에 나왔었죠. 대단한 배우였지요.)

"I am big, it's the pictures that got small!"

(난 아직도 대단한 배우야, 보잘것없어진 건 영화지.)

 

노마 데스먼드는 처음에는 영화계에 "복귀(return)"하려고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교정을 위해 조 길리스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지만, 나중에는 조 길리스를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랑은 점점 집착으로 바뀌어 간다. 노마 데스먼드의 조 길리스에 대한 집착은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집착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노마 데스먼드는 젊은 조 길리스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아직도 매력 있는 여배우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조 길리스 또한 자기에게 돈을 주고, 비싼 옷들과 순금 담배 케이스 등을 사 주는 노마 데스먼드가 싫지만은 않다. 심지어 자기를 위해 Mack Sennett Bathing Beauty를 연출하고, 찰리 채플린의 방랑자를 멋지게 흉내내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은 아직도 대스타라는 망상 속에 빠져 사는 그녀에게 동정심과 함께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재력에 끌려 그녀 곁에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선셋 대로'에서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는 노마 데스먼드보다도 더 무서운 집착을 보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집사인 막스 폰 마이얼링(Erich von Stroheim)이다. 노마 데스먼드의 첫번째 남편이었던 막스 폰 마이얼링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스스로 집사가 되어 그녀 곁을 지킨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도 대스타라는 망상 속에 빠져 사는 그녀를 위해 그녀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등 그녀가 상처 받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다.

조 길리스 역의 윌리엄 홀든, 노마 데스먼드 역의 글로리아 스완슨, 그리고 막스 폰 마이얼링 역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연기는 정말 훌륭하다. 특히 글로리아 스완슨의 연기는 소름 끼친다. 윌리엄 홀든과 글로리아 스완슨은 각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만 모두 수상은 하지 못한다.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지만 역시 수상은 하지 못한다.

현실과 망상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노마 데스먼드처럼, '선셋 대로' 또한 실제와 영화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노마 데스먼드는 자신이 출연한 무성 영화를 조 길리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막스 폰 마이얼링이 영사기를 돌린다. 노마 데스먼드가 조 길리스에게 보여 주는 무성 영화는 실제로 글로리아 스완슨이 출연하고,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이 연출한 '여왕 켈리 (Queen Kelly, 1928)'이다. 막스 폰 마이얼링은 조 길리스에게 무성 영화 시절 당시에 유망한 세 명의 젊은 영화감독이 있었는데, D.W. 그리피스와 세실 B. 드밀, 그리고 자기였다고 말을 한다. 실제로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은 무성 영화 시대의 걸작, '탐욕 (Greed, 1924)'을 연출한, 무성 영화 시대의 거장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비를 고려하지 않은 완벽한 예술적 자유만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영화 제작사와 자주 충돌하게 되고, 결국 발성 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영화감독으로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선셋 대로'에서 막스 폰 마이얼링의 노마 데스먼드에 대한 집착을 완벽한 예술적 자유에 대한 고집으로 대체한다면,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은 '선셋 대로'에서 이름만 막스 폰 마이얼링으로 바뀐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노마 데스먼드는 영화계 복귀를 위해 세실 B. 드밀 감독(Cecil B. DeMille)을 찾아간다. 세실 B. 드밀 감독을 연기하는 이는 실제 세실 B. 드밀 감독이며, 노마 데스먼드가 방문한 촬영장은 세실 B. 드밀 감독의 '삼손과 데릴라 (Samson and Delilah, 1949)'의 실제 촬영장이다. 세실 B. 드밀 감독은 실제로 무성 영화 시절에 글로리아 스완슨을 대스타로 만든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글로리아 스완슨은 발성 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한물간 배우가 된다.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마찬가지로 글로리아 스완슨 역시 '선셋 대로'에서 이름만 노마 데스먼드로 바뀐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한물간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들도 등장한다. 노마 데스먼드와 카드 놀이를 하는 이들 - 조 길리스는 이들을 노마 데스먼드의 밀랍 인형들이라고 표현한다 - 은 실제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들인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 애너 Q. 닐슨(Anna Q. Nilsson), 그리고 H.B. 워너(H.B. Warner)이다. '선셋 대로'는 실제 인물들이나 실제 상황들을 영화의 이야기와 교묘하게 접목시켜, 영화에 마치 다큐멘타리 같은 리얼리티를 주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물간 자기 자신들을 연기하는, 글로리아 스완슨과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을 포함한 이들 배우들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영화가 좀 잔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선셋 대로'의 마지막 장면은 어느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그 어떤 무서운 장면보다도 더 무섭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을 떠나려는 조 길리스를 총으로 쏴 죽인 노마 데스먼드는 자신을 연행하러 온 경찰관들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뉴스 카메라가 왔다는 말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완전히 미쳐버린 노마 데스먼드는 뉴스 카메라를 영화를 찍는 카메라로 생각하고서 영화를 찍고 있는 배우처럼 도도하게 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막스 폰 마이얼링은 노마 데스먼드를 위해 뉴스 카메라 앞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영화감독처럼 행세한다. 노마 데스먼드는 막스 폰 마이얼링을 향해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대사를 날린다.

"All right, Mr. DeMille, I'm ready for my close-up."

(좋아요, 드밀 씨, 난 클로즈업 찍을 준비가 됐어요.)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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