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은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최고의 해라 불릴 만큼 수많은 명작들이 쏟아진 해였다. 현재도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 '굿바이 미스터 칩스 (Goodbye, Mr. Chips, 193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9)', '역마차 (Stagecoach, 1939)', '오즈의 마법사 (The Wizard of Oz, 1939)',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1939)'이 1939년에 나온 영화들이다. 미국의 여류 작가 마가렛 미첼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39년에 나온 수많은 명작들 중에서도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데, 작품상을 포함하여 감독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촬영상, 편집상, 미술상의 8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도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꼽히곤 한다.

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처음 보았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한번 더 볼 때는 원작 소설 완역본과 비교, 분석까지 하면서 보았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지금은 내 기억 속에 소설의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소설과 함께 영화를 볼 당시에는 도저히 영화로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던 방대한 이야기를, 게다가 스케일도 큰 소설을, 물론 소설의 많은 부분의 이야기들이 빠지긴 했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은 빠뜨리지 않은 채 영화에 그대로 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방대한 분량의 소설의 이야기가 아카데미 각색상에 빛나는 당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시드니 하워드의 각색으로 소설의 감동은 그대로 보존된 채 압축되어 영화에 담겨졌으며,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만큼 그 큰 스케일은 막대한 인원과 물량이 투입된 스케일이 큰 화면들이 대신한다. 그 대표적인 유명한 장면이 스칼렛(Vivien Leigh)이 닥터 미드(Harry Davenport)를 찾으러 부상자들을 지나는 장면과 스칼렛과 레트(Clark Gable)가 화염에 휩싸인 애틀란타시를 빠져나가는 장면인데, 스칼렛이 부상자들을 지나는 장면을 찍기 위해 800명의 엑스트라와 800개의 인형이 동원되었으며, 화염에 휩싸인 애틀란타시 장면을 위해 '킹콩 (King Kong, 1933)'의 촬영장으로 쓰였던 12 헥타르나 되는 넓은 세트장을 불태웠다 한다.

무엇보다도 소설과 영화를 같이 볼 당시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영화 속 두 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 역을 맡은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이 소설에서 묘사한 두 주인공의 이미지와 너무나 똑같았다는 점이다. 마치 마가렛 미첼이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을 모델로 스칼렛과 레트의 캐릭터를 창조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영화 속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은 소설 속 스칼렛과 레트 그 자체였다. 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 과정에서 제작자 데이빗 오 셀즈닉의 주연 배우 캐스팅 비화는 유명하다. 데이빗 오 셀즈닉은 레트 버틀러 역으로 일찌감치 클라크 게이블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을 여배우는 애틀란타시가 불타는 장면으로 영화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빗 오 셀즈닉은 2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의 공개 오디션과 캐서린 헵번, 베티 데이비스, 진 아더, 폴레트 고다르, 라나 터너 등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유명한 여배우들의 카메라 테스트를 거친 후, 결국 연극에서 만난 로렌스 올리비에와 사랑에 빠져, '폭풍의 언덕'의 촬영으로 미국에 있는 로렌스 올리비에를 쫓아 미국으로 건너온 영국 여배우 비비안 리를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의 교체 비화 또한 유명하다. 소설이 대중에게 발표되기 이전에 소설의 원본을 먼저 읽은 데이빗 오 셀즈닉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감독으로 조지 쿠커 감독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지 쿠커 감독은 스칼렛 역을 캐스팅하기 위한 유명 여배우들의 카메라 테스트를 포함하여 2년 동안의 사전 제작 준비를 하였으나, 첫촬영이 시작되고 3주만에 빅터 플레밍 감독으로 교체된다. 이를 두고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여러가지 루머들이 나돌았으나, 데이빗 오 셀즈닉의 잦은 시나리오 수정과 영화 제작에의 간섭으로 인한, 조지 쿠커와 데이빗 오 셀즈닉의 불화가 원인이란 설이 지배적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대부분의 멋진 장면들은 주로 영화 전반부에서 보여 주고 있는데, 대부분 조지 쿠커 감독이 연출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삶의 터전이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된 극한 상황 속에서 남부의 대농장 지주의 딸이었던 스칼렛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적으로 남부의 관점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에서도 언급하듯 남부의 생활과 관습, 전통을 문명이라 이르고, 영화 후반부에서 전쟁이 끝난 후 남부로 밀려드는 북부인들을 거의 야만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바람과 함께 사라진 남부의 문명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애슐리 윌키스(Leslie Howard)이다. 애슐리는 전형적인 남부의 신사로,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남부의 생활에 길들여져 전쟁으로 인해 달라진 새로운 시대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는 자기의 부인 멜라니 해밀튼(Olivia de Havilland)에게, 물질적으로는 스칼렛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소설에서는 남부인으로서 남부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와는 타협을 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레트는 이러한 애슐리를 거의 경멸에 가까운 태도로 대하는데, 영화에서는 레트의 애슐리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 있다.

애슐리와는 대조적으로 스칼렛은 어려움 속에서도 - 비록 냉혹해 보이고 부도덕해 보이기도 하지만 -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스칼렛도 전형적인 남부 귀족 스타일의 애슐리에 대한 사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애슐리 못지않게 남부를 그리워하는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로 인해 레트의 진실한 사랑도 깨닫지 못한다. 스칼렛은 멜라니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레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지만, 레트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스칼렛을 뒤로 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Rhett, if you go, where shall I go? What shall I do?"

(레트, 당신이 가면 난 어디로 가야 하죠? 어떻게 해야 하죠?)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솔직히 말해서 내 알 바가 아니오.)

"Tara! Home. I'll go home, and I'll think of some way to get him back.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타라! 내 고향. 고향으로 돌아가 그이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야겠어.

결국, 내일은 또다른 날이 될거야.)

 

레트도, 남부도,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만든 제작자, 감독, 배우들 모두 지금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스칼렛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 스칼렛과 레트의 세기의 로맨스가 맥스 스테이너의 웅장한 음악과 함께 테크니컬러로 만든 화려한 화면 위에 펼쳐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명화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91년에 알렉산드라 리플리에 의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격인 소설 '스칼렛 (Scarlett)'이 출판된다. 난 이 소설도 읽었었는데, 이야기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읽을 당시에도 크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 이 소설도 후에 TV 미니시리즈로 영상화되었는데, 우리나라 TV에서도 방영이 되었었다. 난 이 미니시리즈도 다 보긴 했지만, 기억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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