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은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연출한 일본 영화이다. 일본 영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알게 된 것은 '동경이야기 (東京物語, 1953)'를 통해서였다. '동경이야기'와 '만춘'은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BFI)가 간행하는 영화 전문 월간 잡지 'Sight & Sound'에서 2012년에 발표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50 (Top 50 Greatest Films of All Time)"에서 각각 3위와 15위에 랭크되어 있다. 영화라는 예술이 탄생하면서부터 2012년까지 나온 전 세계 영화들 중에서 선정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50"에 두 편의 영화를 올렸다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영화감독인지를 말해 준다. '만춘'과 '동경이야기'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 세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대표작들이다.
'만춘'에서 노리코(原 節子, Setsuko Hara)가 결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소미야 슈키치(笠 智衆, Chishu Ryu)와 함께 교토로 여행을 하는 장면에서도 잠깐 나오지만, 교토의 용안사(Ryoanji Temple (龍安寺))에 석정(Rock Garden (石庭))이라는 유명한 정원이 있다. 흰 자갈과 몇 개의 돌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정원이지만, 이 정원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보게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되는 느낌을 받으면서 저절로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들은 이 석정과도 같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들 속 영상들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다. '만춘'은 전철역의 간판, 승강장, 신호등, 지붕을 차례로 보여 주는 장면들로 시작한다. 영화 중간 중간에도 영화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러한 소박한 장면들이 신과 신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영상들도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다. '만춘'을 보면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없고, 카메라 앵글은 항상 낮게 맞추어져 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만춘'의 거의 모든 장면을 바닥에서 60cm 정도의 높이에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이러한 촬영 기법과 단순하고 소박한 영상들은 관객들에게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영화의 이야기에 보다 집중하고 그 내용에 대해 보다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만춘'은 영화의 이야기도 단순하고 소박하다. 27살의 노리코는 교수인 홀아버지 슈키치를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슈키치와, 노리코의 고모인 타구치 마사(杉村 春子, Haruko Sugimura)는 혼기가 꽉 찬 노리코의 장래를 걱정하지만, 노리코는 홀로 남게 될 아버지 때문에 시집가기를 꺼린다. 마사는 노리코를 불러, 입 주변이 게리 쿠퍼를 닮은 사타케라는 남자와의 맞선과, 노리코가 시집가면 홀로 남게 될 슈키치와 미와 아키코(三宅 邦子, Kuniko Miyake)라는 미망인과의 재혼에 대해 논의한다. 노리코는 아버지의 재혼 결심에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끼고 결국 맞선을 본 사타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만춘'의 이야기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답게 극적 효과 없이 최대한 담담하게 전개된다. 반전 아닌 반전이 있는 '만춘'의 결말도 별다를 것이 없다는 듯 담담하게 전개된다. '만춘'의 마지막에 노리코를 시집보낸 슈키치는 노리코의 친구인 키타가와 아야(月丘 夢路, Yumeji Tsukioka)와 함께 술을 마시는데, 아야가 정말로 재혼을 하실거냐고 묻자,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노리코는 절대로 시집가지 않았을 거야."라고 대답한다. 사실은 아버지를 홀로 남겨 두고 시집가기를 꺼리는 노리코를 위해 슈키치가 마사와 짜고서 재혼하려는 것처럼 노리코를 속인 것이다.
'만춘'은 일본 사회의 변화와 함께 달라진 일본의 결혼 풍속을 보여 준다. 노리코는 혼기가 꽉 찬 나이지만 결혼 생각은 아예 없고, 슈키치도 노리코의 장래를 걱정은 하면서도 노리코에게 결혼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사는 집도 현대식이고 직업도 속기사인 아야는 이혼을 한 여자다. 슈키치의 친구이자, 역시 교수인 오노데라 조(三島 雅夫, Masao Mishima)는 늙은 나이에 재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풍속은 변해도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슈키치의 대사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교토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노리코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결혼한다고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자 슈키치가 말한다. "그건 사실이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 난 벌써 56살이야. 내 인생은 끝나 가고 있어. 하지만 네 인생은 지금부터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거야. 사타케와 함께 만들어 갈 인생이. 나와는 상관없는 인생이. 이것이 인생사의 순리야. 결혼하자마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야. 결혼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은 잘못이야. 행복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야. 결혼하는 것이 행복은 아니야. 부부가 새로운 인생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행복이야. 1년이나 2년, 또는 5년이나 10년이 걸릴 지도 모르지. 그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거야. ..."
무엇보다도 '만춘'은 슈키치와 노리코를 통해 아버지와 딸의 관계,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노리코는 착한 딸이다. 영화가 너무나 담담하게 전개되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아버지를 위하는 노리코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노리코는 아버지의 조수인 핫토리 슈이치(宇佐美 淳, Jun Usami)와 자전거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관객들은 노리코와 슈이치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슈이치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지만 슈이치는 노리코에게 콘서트에 같이 가자며 노리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노리코는 거절하는데, 이는 슈이치에게 이미 약혼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결혼하게 되면 홀로 남게 될 아버지 때문이다. '만춘'의 마지막에, 드디어 시집을 가는 노리코가 집을 나서기 전에 슈키치 앞에 무릎을 꿇고, 슈키치에게 키워 주신 은혜에 감사의 인사를 하는 장면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슈키치도 좋은 아버지다. 슈키치는 노리코를 시집보내기 위해 노리코에게 거짓말을 한다. 재혼을 할 거냐고 다그쳐 묻는 노리코에게 그렇다라고 대답을 하는 슈키치의 입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토 여행 중 용안사의 석정에서 슈키치가 조에게 말한다. "아들이 좋아. 딸은 별로야. 다 키워 놓으면 결혼한다고 떠나 버리니 말이야. 결혼을 안 하면 걱정되고, 결혼을 하면 너무 섭섭하고."
노리코를 시집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슈키치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보여 주는 '만춘'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의 허전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노리코의 신랑 사타케는 영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관객들에게 출가외인의 느낌이 들게 함으로서 딸을 시집보낸 슈키치의 허전한 마음을 최대한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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