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일본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전에 봤던 일본 영화를 최근에 다시 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당히 높은 일본 영화의 수준에 새삼 놀라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이야기 (東京物語, 1953)'를 본 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도 보게 되었는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라쇼몽'이 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라쇼몽'은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BFI)가 간행하는 영화 전문 월간 잡지 'Sight & Sound'에서 2012년에 발표한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50 (Top 50 Greatest Films of All Time)"에서 26위에 랭크되어 있는 영화이다. '라쇼몽'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아카데미 명예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하시모토 시노부와 함께 쓴 '라쇼몽'의 각본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 편의 단편 소설, '라쇼몽 (羅生門)'과 '숲속 (藪の中)'을 바탕으로 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라쇼몽'의 배경은 헤이안 시대인 11세기이며, 라쇼몽은 당시 지금의 교토에 있었던 성문이다.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전란으로 폐허가 된 라쇼몽에 들른 평민(上田吉二郎, Kichijiro Ueda)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나무꾼(志村 喬, Takashi Shimura)과 승려(千秋 實, Minoru Chiaki)를 발견한다. 나무꾼과 승려는 자신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최근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평민에게 들려준다.
타케히로(森 雅之, Masayuki Mori)와 그의 아내 마사코(京 マチ子, Machiko Kyo)가 숲속 길을 가다 도적 타조마루(三船 敏郎, Toshiro Mifune)를 만난다. 타조마루는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마사코를 겁탈한다. 그리고 나무를 하러 숲속에 들어온 나무꾼이 사건 현장에서 타케히로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관청에 붙잡혀 온 타조마루와 마사코, 그리고 무당(本間文子, Noriko Honma)의 힘을 빌어 강신한 죽은 타케히로가 재판관 - 화면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 앞에서 진술을 하지만, 세 명 모두 서로 다른 진술을 한다.
'라쇼몽'은 플래시백으로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이다. 비가 내리는 라쇼몽에서 나무꾼과 승려가 평민에게 들려주는 사건들, 즉 나무꾼이 타케히로의 시체를 발견하고, 타조마루와 마사코, 죽은 타케히로가 관청에서 진술하게 된 경로를 플래시백으로 보여 주고, 관청에서 타조마루와 마사코, 죽은 타케히로가 각자의 관점에서 진술하는 사건의 정황들을 또 다른 플래시백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에 연루되기 싫어서 관청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타케히로의 시체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다고 실토한 나무꾼이 평민과 승려에게 진술하는 사건의 정황을 플래시백으로 보여 준다.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타조마루와 마사코, 죽은 타케히로의 진술은 다 다르다. 심지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의 진술도 세 명의 것과 다르다. 타조마루는 자신이 마사코를 겁탈하고 타케히로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마사코는 자신을 받아들였고, 타케히로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진술한다. 마사코는 타조마루에게 겁탈을 당한 자신을 남편은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았고, 억울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죽은 타케히로는 겁탈을 당한 후 타조마루에게 넘어간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 하였고, 오히려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해 준 것에 비참함을 느껴 자결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나무꾼의 진술에 의하면, 마사코는 타조마루를 받아들였고, 타조마루와 타케히로는 서로 싸우는 것이 겁이 나 마사코에게 비겁하게 행동했으며, 그러자 마사코가 두 남자를 부추겨서 서로 싸우게 했고, 두 남자는 정정당당히 남자답게 싸웠다는 타조마루의 진술과는 달리 용렬하기 짝이 없는 개싸움을 벌였고, 이 와중에 타조히로가 얼떨결에 타케히로를 죽였다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라쇼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해진다. '라쇼몽'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악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술을 하기 때문에 인간사에서 진실이라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쇼몽'은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기억의 주관성에 관한 이론인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라쇼몽'에서 승려가 말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약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겁니다."
네 명의 진술 중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고 사건을 목격하기만 한 나무꾼의 진술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나무꾼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허세가 있는 타조마루는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자신의 비겁했던 행동들을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가볍게 보이기 위해서 타케히로를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마사코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하면서까지 자신의 부도덕함을 숨기고, 자신이 지조 있는 여자로 보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죽은 타케히로는 타조마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비겁했던 행동들을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 대한 분노로 인해,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 하였고, 그래서 자결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나무꾼의 진술을 들은 평민이 사건 현장에서 사라진 마사코의 값비싼 단도를 나무꾼이 훔쳤기 때문에 나무꾼의 진술도 거짓말이라고 하자 나무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로써 사건에 대한 진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관객들에게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한 존재라는 믿음을 애써 주기 위해서 다소 억지스럽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라쇼몽'은 라쇼몽의 한구석에서 발견된 버려진 아기를 자신이 키우는 것으로 속죄를 하겠다는 나무꾼을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라쇼몽'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이야기만큼이나 기발하고 창조적인 영상들을 보여 준다. 타조마루와 마사코, 죽은 타케히로의 진술을 듣는 관청의 재판관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타조마루와 마사코, 그리고 죽은 타케히로의 혼령을 불러온 무당은 카메라를 보고 진술을 하는데, 마치 관객들에게 재판관이 되어 누구의 진술이 진실인지를 판단해 보라고 하는 듯하다. 또한 오늘날에는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태양을 직접 촬영한 장면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아름다운 영상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특히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지는 숲속 개울가에서 마사코가 휴식을 취하면서 타조마루를 따라간 남편을 기다리는 장면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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