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에 발표한 필립 K. 딕의 소설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이 원작인 '블레이드 러너'는 개봉 당시에는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영화가 너무 혼란스럽고 난해하다 하여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2주 먼저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 (E.T.: The Extra-Terrestrial, 1982)'에 밀려 관객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던 영화이다. 하지만 1992년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직접 재편집한 감독판이 나오면서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2007년에 새로이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 (AFI's 100 Years...100 Movies)"에서 97위를 차지하면서 지금은 SF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2019년 11월, LA. 리들리 스콧 감독이 보여 주는 미래의 세상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환경 오염으로 인해 태양은 가려져 낮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고, 비는 끊임없이 내린다. 일본의 자본적 제국주의에 잠식 당한 듯 고층 빌딩에는 일본 여인이 등장하는 대형 광고 화면들이 어두운 도시를 밝히고 있고, 거리에는 일본어로 된 네온 사인들이 넘쳐난다. 레플리컨트(인조 인간)를 창조한 타이렐 박사(Joe Turkel)가 사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빌딩과, 이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어둡고 지저분한 거리는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을 보여 주고 있고, 가난과 오염된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사람들은 지구 밖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 '블레이드 러너'의 주제는 개봉 당시 단순히 SF 액션 영화로 소개된 것과는 달리 굉장히 철학적이다. 4년으로 제한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구로 잠입한 레플리컨트들과, 지구에 잠입한 레플리컨트들을 "퇴거(retirement)"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는 특수 경찰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Harrison Ford)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아주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레플리컨트들은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들을 보여 주는데, 이를 통해 인간성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인 주제만큼이나 모호한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관객들에게 수많은 논쟁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논쟁이 데커드의 실체 - 인간인가, 레플리컨트인가 - 에 관한 논쟁이다.

데커드의 실체에 관한 논쟁은 '블레이드 러너'의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벌어졌는데, 제작자 마이클 딜리와 데커드를 연기한 해리슨 포드는 데커드는 인간이라고 견해를 밝히지만, 각본을 담당한 햄프턴 팬쳐는 데커드가 인간이냐 레플리컨트냐 하는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를 밝힌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자신이 직접 재편집한 감독판과 2007년에 공개한 최종판에서, 데커드가 유니콘의 꿈을 꾸는 장면과, 데커드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개프(Edward James Olmos)가 남긴 종이로 접은 유니콘을 발견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암시, 즉 데커드가 레플리컨트인 레이첼(Sean Young)에게 주입된 기억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개프도 데커드에게 주입된 유니콘의 꿈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통해, 데커드는 레플리컨트라고 데커드의 실체에 관한 그동안의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블레이드 러너'의 팬들 사이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이야기 전개에서 데커드의 실체에 관한 논쟁과 관련된 모호한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지구로 잠입한 여섯 명 - 남자 셋, 여자 셋 - 의 레플리컨트들 중 하나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브라이언트 반장(M. Emmet Walsh)이 데커드에게 지구로 잠입한 레플리컨트들에 대한 브리핑을 할 때, 레플리컨트들이 타이렐사를 침입하려다 제거된 한 명의 레플리컨트를 제외한 네 명의 레플리컨트들 - 레온(Brion James), 로이(Rutger Hauer), 조라(Joanna Cassidy), 프리스(Daryl Hannah) - 의 기록을 보여 주지만, 나머지 한 명의 레플리컨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데커드가 조라를 "퇴거"시킨 후 브라이언트 반장과의 대화에서, 이 나머지 한 명의 레플리컨트가 레이첼이라는 암시를 주지만 명확하지 않다. 게다가 브라이언트 반장이 브리핑에서 레플리컨트들이 타이렐사를 침입하려다 제거된 레플리컨트를 언급할 때 "he" 또는 "she" 대신 "one"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나머지 한 명의 레플리컨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모호하게 해놓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를 통해 이 나머지 한 명의 레플리컨트가 데커드일 수도 있다는 묘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 이렇게 본다면 레플리컨트들이 타이렐사를 침입하려다 제거된 "하나(one)"의 정체 - 레이첼?, 데커드?, 아니면 또다른 뉴규? - 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게 된다.

어쨌든 데커드가 인간이냐 레플리컨트냐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데, 데커드가 인간이든 레플리컨트이든 영화의 주제나 이야기 구조는 달라지지 않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이야기의 깊이가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데커드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조라를 슬로 모션(slow-motion)으로 처리한 장면에서, 만약 데커드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살려고 도망가는 조라의 등 뒤에서 총을 쏜 비인간적인 인간 데커드의 모습이 살고자 발버둥이치는 조라의 인간적인 모습과 대조가 되어, 레플리컨트이지만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조라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그러나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라고 한다면, 레플리컨트를 "퇴거"시키기 위해 레플리컨트를 이용한 비인간적인 인간들의 모습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상대적으로 살고자 하는 조라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데커드가 레이첼에게 자신에게 키스해 달라고 말하라고 강요를 하면서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도 데커드가 인간이냐 레플리컨트냐에 따라 분위기나 이야기의 깊이가 달라지는데, 만일 데커드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레플리컨트라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레이첼에게 연민을 느끼고, 레이첼에게 인간성을 느끼게 해주려는 데커드의 모습에서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레이첼에게 애틋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라고 한다면, 자신 또한 레플리컨트라는 사실도 모른 채 레이첼에게 연민을 느끼는 데커드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레이첼뿐만 아니라 데커드에게도 애틋함을 느끼게 된다.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그 모든 기억들이 빗속의 눈물처럼 곧 사라지겠지. 죽을 시간이야.)

 

수명을 연장하는데 실패한 로이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 데커드를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 주고 자신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로이는 비록 레플리컨트이긴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와서는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게다가 죽음을 앞두고 평화롭게 웃는 로이의 얼굴 표정에는 인간적인 모습을 넘어 자비로운 성인의 모습마저 느낄 수 있다. 로이가 자신의 손이 마비되어 가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손바닥에 못을 박고 그 손으로 데커드를 구해주는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인간을 구원한 예수를 연상시켜 종교적인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개봉하고 25년이란 세월이 지나고서야 걸작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블레이드 러너'는 보면 볼수록 그 깊이가 느껴지는 영화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지금까지 총 7개의 버전이 공개되었는데, 1982년에 공개된 극장판과 1992년에 공개된 감독판은 삭제된 장면을 다시 붙여 넣은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를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이 데커드의 독백과, 데커드와 레이첼이 도시를 벗어나는 마지막 장면인데,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들이 영화의 주제와 이야기를 해친다 하여 감독판에서 모두 삭제한다. 이것이 '블레이드 러너'가 극장판으로 개봉될 당시에 영화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블레이드 러너'의 깊이를 느끼려면 1992년 감독판이나 2007년 최종판으로 감상하여야 한다.

Posted by unforget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