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로 유명한 멜 깁슨이 제작과 감독, 주연까지 겸한 '브레이브하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의 왕, "롱솅크스(Longshanks)" 에드워드 1세(Edward I)에 맞서 싸운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멜 깁슨 감독은 '브레이브하트'에서 언급할 만한 영화 예술적인 영상미나 의미 심장한 화면의 구성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지만, 직설적이고 거친 화면들의 대담한 전개를 통해서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의 전개만큼은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 주고 있다. 멜 깁슨 감독은 자신의 이러한 연출력을 이용하여 윌리엄 월레스의 사랑과 용기, 집념을 녹색의 광활한 자연을 바탕으로 감동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과도하게 잔인한 장면과, 특히 영화의 극적인 구성을 위해 역사를 너무나도 심하게 왜곡시킨 점은 눈에 거슬린다.

스코틀랜드의 왕,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가 후계자 없이 죽자, 잉글랜드의 왕, 롱솅크스(Patrick McGoohan)는 스코틀랜드의 왕위마저 탐을 낸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롱솅크스와 대립하게 되고, 이 와중에도 왕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자기네들끼리도 싸우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롱솅크스는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기 위한 일단계로, 잉글랜드 귀족들의 스코틀랜드로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한 프리마 녹테(primae noctis, 초야권)를 부활시킨다.

'브레이브 하트'는 롱솅크스를 이교도에다 비열한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의 관점에서 만든, 그리고 영화의 극적인 구성을 위한 설정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English Justinian)"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유능한 왕이었다. 그리고 프리마 녹테는 영화에서 잉글랜드의 폭정을 부각시키고 스코틀랜드의 민중 봉기가 일어나게 된 하나의 계기를 주기 위해 도입된 영화적 장치일 뿐이지, 실제로 에드워드 왕조가 프리마 녹테를 사용한 적은 없다. 윌리엄 월레스(Mel Gibson)가 잉글랜드에 맞서 봉기를 하게 된 원인이 프리마 녹테를 피해 몰래 맞이한 아내, 머론(Catherine McCormack)의 죽음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1297년 5월,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Lanark의 잉글랜드 치안 담당관이었던 William Heselrig를 죽인 사건을 윌리엄 월레스의 봉기의 시발점이라고 보고 있는데, 윌리엄 월레스가 정사(正史)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 이전의 윌리엄 월레스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와는 달리 윌리엄 월레스에게 아내가 있었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1297년 9월 11일, 윌리엄 월레스는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털링(Stirling)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한다. 실제로 스털링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영화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평원이 아니라 포스강(River Forth)의 스털링 다리 근처였다. 당시 잉글랜드군의 기병의 숫자가 스코틀랜드군의 기병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스코틀랜드군은 거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군이 이길 수 있었던 건 기병대가 한꺼번에 건너가기 힘든 좁은 다리의 지형을 이용한 스코틀랜드군의 뛰어난 전술 때문이었다. 하지만 멜 깁슨 감독은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을 위해 스털링 전투를 다리 근처가 아닌 평원에서 벌어진 것으로 설정했다.

1298년 7월 22일, 스털링 전투의 패배로 위협을 느낀 롱솅크스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폴커크(Falkirk)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과 대적한다. 스코틀랜드군은 지원을 하기로 약속을 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배신으로 잉글랜드군에게 패하게 되고, 윌리엄 월레스는 간신히 목숨만은 건지고 잉글랜드군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영화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귀족인 브루스(Robert the Bruce, Angus McFadyen)가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스코틀랜드를 배신하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물론 후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롱솅크스와 잠깐동안 손을 잡긴 하지만, 폴커크 전투 당시엔 윌리엄 월레스와 스코틀랜드의 봉기를 지지했었다. 브루스는 1314년에 배넉번(Bannockburn)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Edward II)의 잉글랜드를 물리치고, 1328년에 에드워드 3세(Edward III)와의 에딘버러-노샘프턴 조약(Treaty of Edinburgh-Northampton)으로 마침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한 스코틀랜드의 왕 리차드 1세(Richard I)가 바로 그이다.

폴커크 전투의 패배도 윌리엄 월레스의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쟁은 멈추지 못한다. 윌리엄 월레스와 그의 봉기군은 일종의 게릴라전으로 잉글랜드군과 롱솅크스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한편, 롱솅크스의 아둔한 왕세자 에드워드 왕자(Peter Hanly)와 결혼을 한 이자벨 공주(Sophie Marceau)는 롱솅크스의 사자로서 윌리엄 월레스를 만난다. 이자벨 공주는 윌리엄 월레스의 성품에 이끌리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진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자벨 공주와 윌리엄 월레스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을 당할 때 이자벨 공주가 죽어 가는 롱솅크스에게 자기의 배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는 에드워드 왕자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는 통쾌한 장면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후에 그 유명한 백년전쟁을 촉발시킨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가 윌리엄 월레스가 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진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을 당할 당시 이자벨 공주의 나이는 9세였으며, 이자벨 공주가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을 한 1308년은 에드워드 왕자가 아버지 롱솅크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후이고, 롱솅크스가 죽은 지 1년,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을 당한 지 3년이나 지난 때이다. 따라서 롱솅크스가 자기의 아들과 이자벨 공주를 결혼시켰다는 영화의 설정 역시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잘못된 것이다.

"Freedom!"

(자유!)

 

결국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귀족의 또 한번의 배신으로 잉글랜드군에게 잡히게 된다.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조국의 독립과 동포의 자유를 외치는 윌리엄 월레스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하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게끔 만들고 있다.

참수를 당한 뒤 윌리엄 월레스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져 머리는 런던 브릿지에 걸렸고, 팔과 다리는 영국의 네 변방에 경고용으로 보내졌지만, 롱솅크스가 기대한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1314년, 스코틀랜드의 아들들은 굶주림과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배넉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맞아 스코틀랜드인답게 용감하게 싸웠고, 결국 그들은 그들의 소중한 자유를 쟁취하게 된다.

윌리엄 월레스의 영향은 그가 죽은 지 690년이 지난 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까지 계속되는데, 멜 깁슨 감독은 '브레이브하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쟁취하게 되며, 영화는 감독상을 포함, 작품상, 촬영상 등 5개의 아카데미상을 쟁취한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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