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Vertigo, 1958)

영화 2010. 7. 6. 13:12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새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새로운 영화 기술에 대한 도전을 즐긴, 실험 정신이 강한 감독 중 하나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이 느끼는 공포나 불안, 긴장과 같은 감정들을 관객들도 똑같이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고, 이를 위해 새로운 영화 기술들을 창조, 발전시켰다. 또한 인간의 특정 심리나 본성을 영화의 이야기에 끌어들여 이를 탐구하고, 관객들이 영화의 화면을 통하여 이를 간접 경험 하게 함으로서 관객들을 좀더 강하게 영화에 끌어들이기 위한 영화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예를 들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 자체가 인간의 관음증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관음증을 영화에서 많이 다루었는데, 인간의 관음증을 직접적으로 다룬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창 (Rear Window, 1954)'을 보면, 관객들이 보는 영화의 화면을 영화의 주인공인 제프리스(James Stewart)가 이웃 사람들의 행동을 훔쳐 보는 시점과 동일시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의 화면을 통해 훔쳐 보기를 간접 경험 하게 하고, 이를 통해 관객들을 영화에 좀더 강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현기증'에서도 관객들을 영화에 좀더 강하게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영화 기술들을 시도하고 있는데, '현기증'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영화의 기술과 형식이 가장 뛰어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현기증'은 발표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기만 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영화의 이야기를 지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영화에 숨겨진, 지금도 수많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모방되어지고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기증'의 독특하고 세련된, 심지어는 아름답기까지 한 영화의 기술과 형식으로 인해 '현기증'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오늘날에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뿐만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도 최고의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 '현기증'은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AFI)가 1998년에 선정한 "위대한 미국 영화 100 (AFI's 100 Years...100 Movies)"에서는 61위를 차지하였으나, 새로이 선정한 2007년 10주년 기념판에서는 9위를 차지하였다.

'현기증'은 영화의 이야기 구조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반부는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소 공포증 때문에 동료 경찰관을 숨지게 한 사고로 형사 일을 그만둔 존 "스카티" 퍼거슨(James Stewart)이 대학 동기인 가빈 엘스터(Tom Helmore)의 부탁으로 망령에 사로잡힌 가빈의 부인 매들린(Kim Novak)의 뒷조사를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스카티는 매들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하지만 또다시 자신의 고소 공포증 때문에 망령에 사로잡힌 매들린의 자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으로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후반부는 스카티가 죽은 매들린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카티는 길에서 우연히 보게 된, 매들린을 너무나도 닮은 주디 바튼(Kim Novak)이라는 여자에게 접근하여 교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매들린을 잊지 못한 스카티는 주디에게 매들린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게 하고, 매들린과 같은 옷을 입게 하는 등, 거의 싸이코와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곧 스카티는 주디를 통해 매들린의 자살에 숨겨진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스카티가 매들린의 뒷조사를 하는 전반부에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다시 한번 인간의 관음증을 다루어 관객들을 영화에 끌어들이고 있다. 스카티가 레스토랑에서 매들린을 처음 보는 장면, 매들린을 미행하는 장면, 그리고 꽃을 사는 매들린을 문 틈으로 바라보는 장면 등에서 영화의 화면을 스카티의 시점과 동일시하여 스카티가 느끼는 매들린에 대한 호기심과 훔쳐 보는 데서 오는 긴장감을 관객들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또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스카티가 매들린의 행동을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매들린의 신비함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시점 - 스카티가 매들린을 미행해 묘지에 도착한 순간 - 에서부터 매들린이 등장하는 화면을 현실 세계가 아닌 것처럼 뿌옇게 처리하여, 스카티가 망령에 사로잡힌 매들린에게 느끼는 신비함과, 매들린에 빠져들수록 자신 또한 현실에서 점점 괴리되어 가는 스카티의 심적 상태를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한 화면 처리는 오히려 스카티가 망령에 사로잡히는 후반부에서 더욱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매들린과 똑같은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주디가 녹색의 조명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스카티의 넋이 나간 얼굴 표정과 어우러져 기괴한 분위기와 함께 섬뜩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현기증'에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고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스카티가 높은 곳에서 느끼는 현기증을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해 주기 위해 새로운 영화 기술을 시도하고 있는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현기증'에서 처음 사용하였다고 하여 현기증 효과(Vertigo effect) 또는 히치콕 줌(Hitchcock zoom)이라고도 불리우는 줌 인/돌리 아웃(zoom in/dolly out) 기술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범인을 쫓다 지붕에서 미끄러져 처마 끝에 매달린 스카티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도 스카티가 느끼는 현기증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현기증'의 가장 큰 특색은 몇몇 특정 장면들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서 스카티가 매들린을 처음 보는 장면, 스카티가 맥키트릭 호텔 방 창문을 여는 매들린을 관찰하는 장면, 매들린이 스카티의 가운을 입고 스카티 앞에 나타나는 장면은 후반부에서 스카티가 주디를 처음 보는 장면, 스카티가 엠파이어 호텔 방 창문을 여는 주디를 관찰하는 장면, 주디가 매들린의 옷차림을 하고 스카티 앞에 나타나는 장면과 각각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전반부의, 망령에 사로잡힌 매들린에게 빠져드는 스카티의 이야기와, 후반부의, 매들린의 망령에 사로잡힌 스카티에게 빠져드는 주디의 이야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장면들과 이야기들을 통해, 영화의 제목처럼 스카티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관객들에게도 느끼게 하고, 또 그만큼 영화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Posted by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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